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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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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국내춤기행,동해안 별신굿 〈울산 신암편⓵〉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5년 주기의 어촌축제 - 신암별신굿 이번 국내 춤기행은 동해안별신굿을 중심으로 한반도 동남 해안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속의례춤의 현황을 파악하고 춤사위를 분석하여 한국 전통춤의 지역적 특성을 규명하는 일환으로 민속현장조사 기행을 떠났다. 동해안지역 별신굿은 남쪽 끝 부산지역에서 울산, 경북, 강원도에 이르는 동해안 어촌을 중심으로 풍어제와 마을굿이다. 어촌마을마다 제각기 열리는 별신굿은 격년, 3년, 5년 등 마을의 형편상 정기적(사정상 비정기도 있음)으로 풍어제 또는 별신굿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성한 마을 공동기금으로 운영한다. 이때 큰무당(*)들을 모셔 큰 굿판을 벌이고 마을 축제를 열어 풍어를 빌고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재제초복을 비는 정기적인 큰굿이다, 2015년 2월21일(음1월3일)부터 4일 동안 행하는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암면 부둣가에 5년마다 열리는 풍어를 기원하는 신암별신굿을 현장조사하려고 촬영장비와 며칠을 지내려는 생활용품까지 큰 배낭과 가방까지 들쳐 메고 설 다음날(2월20일)에 일찍 용인에서 부산행 버스를 탔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 도착한 부산버스터미널(노포동)에 부산의 한국무용가 신은주선생(부산춤공간 Shin 대표)이 마중을 나왔다. 점심을 같이 들고 부산에 온 김에 김덕명선생님(양산학춤 전승자, 92세)을 뵙고 가려고 댁으로 찾아 갔다. 일전((2월9일)에 ‘부산춤공간 Shin 기획토론회’ 때는 신장 투석한 날이라서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시던 분이 이날은 줄곧 두 시간에 걸쳐 지성승무의 유래와 전승에 대해 증언해주셨다. 더 이상 면담하기가 미안해서 다음에 증언을 더 듣기로 하고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암마을로 떠났다. 마침 서생면 신암마을 근처가 신은주선생의 고향이라 어린 시절 이야기와 지역생활사까지 들으며 바다 경치를 만끽하면서 신암부둣가 신암제당에 도착하였다. 내일 열릴 굿판 상황을 상황과 시작 시간과 일정을 물어보고 촬영 위치까지 점지한 다음 저녁식사를 하러 나왔다. 어둑어둑해진 바닷가에는 흔히 생각하는 어촌의 풍경이 아니었다. 현대화된 해안도시의 밤풍경과 네온사인 등이 현란하고 음식점들과 별장, 펜션 등이 즐비했다. 찾다보니 부산 기장까지 와서 바닷물 가에 바짝 붙여 지은 수십 개의 방갈로 별채로만 지어진 독특한 음식점(고스락)이 맘에 들어 울산밤바다를 만끽하며 식사를 하고 숙소를 잡아 여독을 풀었다. *큰무당- 큰무당, 선무당과 점쟁이, 비래쟁이(막음쟁이)의 명칭은 기예능의 한계, 조직규모, 단골판 등에 의해 크게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큰무당’은 우선 대대로 가계 전승된 세습무로 기예능이 뛰어나며, 많은 인원(20~30명)의 집례자의 조직력을 갖춘 친척들로 3일에서 7일 내외로 20~30거리의 대규모의 별신굿이나 오구굿을 연행할 수 있는 무계집단을 일컫는다. 이에 비해 ‘선무당’은 ‘설익은 무당’이란 뜻으로 개인적인 강신무들로 기예능은 약하지만 신과의 소통력으로 공수내림을 잘 하여 12거리 이내로 하루나 이틀 정도의 굿을 집례자 2~5명이내로 소집단을 형성하여 앉은거리와 선거리를 연행하는 중규모의 무계집단이다. ‘비래쟁이’와 ‘막음쟁이’는 강신적 또는 학습적으로 터득한 능력으로 1~2명(무녀와 악사)의 집례자가 한나절 정도로 개인이나 가정의 우환을 퇴치하는 앉은거리, 비손, 막음질을 행하는 유형이다.*허개등- 굿청 밖에 높이 허공에 매단 허괘등(虛卦燈), 불교 지화장엄에 유래된 화개등(花蓋燈)으로 흑애등, 호개등, 허계등, 후개등으로 불리는 대내무살 뼈대로 엮어 오색화지를 붙여 만든 등이다. 동해안 별신굿과 오구굿에서 굿이 열리는 곳을 신과 인간에 알리는 기능, 풍농풍어를 기원할 때 신(망자)이 머물고 이동(저승)하는 수단의 무구이다. <당맞이굿>에서 마을 수호신을 굿당으로 모시는 ‘골매기 청신춤’ 신암별신굿이 열리는 첫날(음력 정월 초산날) 신암마을 바닷가 제당에 10시부터 한다기에 30분 미리 도착하여 촬영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굿의 첫거리인 <제주집 안굿>은 전날 저녁에 했다는 것이며, 오늘시작은 둘째거리인 <당맞이굿>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어서 아쉬웠다. 참관했던 굿연구학자(김신효, 이균옥)들에게 물어보니 제주(祭主, 김정례)집과 이장(이동우)집에서 두 번 집안굿으로 간단한 굿상차림에 부정거리와 청좌거리에 어어 소지(燒紙)올리는 등의 비손처럼 청신(請神)을 하였다고 한다. 별신굿 전체를 ‘청신(請神), 오신(娛神), 송신(送神)’과정으로 구분할 때, 청신 부분에 해당하는 굿거리는 <부정거리>, <청좌거리>, <당맞이굿>, <문굿(문당굿)>까지이다. 별신굿에서 마을 전체의 안녕을 위한 본격적인 시작은 마을의 수호신인 골매기신(*)을 모시는 <당맞이굿>이 청신(請神)과정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당맞이굿>은 골매기가 있는 당나무나 당집 등지로 가서 골매기신을 내림대에 내려서 굿당으로 모시고 오는 굿거리이다. 골매기를 굿당에 모셔 놓은 후부터 굿거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별신굿이 벌어지는 굿당에 모셔진 골매기는 별신굿이 끝나는 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신암별신굿이 열리는 첫날 바닷가 제당 앞에 천막으로 마련한 굿판에 들어가기 전에 10시 10분(80분간) <당맞이굿>을 하러 가기 위해 앞마당에서 무녀들과 양중(악사)들이 풍물을 한바탕 치며 춤을 추며 돌다가 마을 주민대표가 대잡이로 골매기대(*)를 앞세우고 골매기 서낭당으로 향하였다. 골매기대에 이어 양중(남무악사)들의 풍물가락에 맞추어 무녀들이 춤을 추며 따르고 주민들이 함께 뒤를 따랐다. 유씨 골매기 할배 서낭당에 도착하여 상당굿으로 간단한 굿상을 진설한다. ①김동연 무녀(동해안 별신굿 전수조교)가 부정바가지에 부정물과 신칼을 들고 온갖 부정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고 굿당주변을 깨끗이 정화하기 위해 장구장단에 부정무가를 한다. ②부정무가를 마치면 꽹과리가 합세하여 빠른 장단으로 바뀌며 신칼로 부정물을 찍어 뿌리며 부정을 물리친다. ③주민대표들이 굿상 앞에 절을 한다, ④부채와 수건을 들고 골매기 유씨할배신을 모시는 청보무가를 부르고 양중은 "모시자 에시자!”소리로 바라지를 한다. ⑤당을 향해 절을 하고, 이어서 신칼과 명태포를 들고 휘돌리며 빠른 거무장단에 다양한 손동작으로 손신무관을 잠깐 추다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 장단이 느려진다. ⑥모름채 장단에 양손을 모으고 앞으로 굿상을 향해 허리를 숙여 살짝 엎어지듯이 토구름을 하고 강신무들이 접신하듯이 몸을 잠시 떨듯이 토구름(*)을 한 다음 왼쪽으로 돌아 절을 한다. ⑦"의허여- 하염없어!”하면서 귀곡성(鬼哭聲)을 잠깐 소리 지르고 "신암대동 안에 우리별신 내별신...유씨 골매기 할배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축원사설을 한다. ⑧수부채장단에 술을 술잔에 부어 잡신들을 보내고 마을주민과 제관들에게도 음복주를 내리고 별비(*)를 받고 계속 굿상 밖으로 잡신과 사자(死者)들에게도 술을 뿌린다. ⑨ 굿상의 제물을 모아 한지를 받쳐 사자밥으로 당산나무 아래에 모아둔다. ⑩"에루 지신아! 지지신 지신을 울리자!” 지신밟기 무가를 양중들과 함께 소리쳐 부르고 길군악 풍물을 치며 다음 골매기당으로 길놀이를 하며 행진한다. 골목길 주택가에 납작 바위 앞에 가볍게 굿상을 진설하고 이번에는 김동언 무녀(부산시 기장 오구굿 보유자)가 주관하여 염씨 할매신을 모시는 중당굿을 연행하였다. ①부정물과 신칼을 들고 부정무가와 부정물림, ②부채와 신칼 들고 청배무가(양중들은 "아시자 모시자!”)와 주민들 굿상 청배, ③굿상에 절한 다음 명태와 부채를 들고 모름채장단에 토구름춤(굿상 보며 양손 앞으로 상하 흔들기, 오른쪽으로 방향 바꿔가며 사방에 양손 앞을 상하 흔들기, 왼쪽으로 돌며 양손 펴 어르며 돌기, 반대로 돌며 양손 펴 어르기, 굿상 앞을 향해 양손 앞으로 들고 잠시 멈추기, 몸을 잠시 떨며 앞으로 자빠지듯 토구름하기, 양손을 앞으로 펴 좌우 흔들기, 왼쪽돌기, 굿상에 절하기), ④명잔 복잔 돌리기(꽹과리를 접시삼아 술잔을 주민 대표에 주고 별비받기), ⑤소지종이를 태워 올리며 축원하기, ⑥사자밥주기(술을 뿌리고 과일과 떡을 한지로 싸 내려놓기), ⑦신명나게 "에루 지신아! 지신지신 울리자!”하며 지신밟기무가와 풍물을 치고 다시 길놀이로 용왕당으로 행진한다. 부두 가까이 바닷물 앞에 굿상을 차리고 양중들이 원으로 풍물을 치며 신명나게 치며 돈다. 김영숙 무녀(동해안별신굿 전수조교)와 김용택 양중(동해안 별신굿 보유자)이 장구를 치며 용왕님을 모시는 하당굿을 진행하였다. 먼저 무녀가 부정무가를 하면 양중은 "에헤 영정아!”하고 바라지소리를 한다. ①부정물 바가지를 들고 신칼을 좌우로 흔들며 사방을 돌며 부정을 물린다. ②무가를 마치면 멈췄던 꽹과리들이 빠른 장단을 치며 무녀는 신칼로 부정물을 찍어 사방에 뿌린다. ③신칼을 들고 한 바퀴를 돌아 굿상에 절을 하고 부정물을 밖에 버린다. ④부채와 수건을 들고 한 바퀴 돌고 왼쪽으로 한 바퀴 돌아 굿상에 절을 두 번 한다. ⑤청보무가를 하면 양중들은 "애시자 모시자!”로 받는다. ⑥무가를 마치면 양손을 들었다 내리며 절을 두 번한다. ⑦모름채장단에 굿상을 향해 명태 한 마리와 신칼을 들고 양손을 좌우 흔들며 춤춘다. ⑧전진후진에 이어 오른쪽으로 돈다. ⑨양중들을 향해 전진후진과 왼쪽으로 세 바퀴 돌며 점차 느려져 굿 앞에 향해 멈춘다. ⑩눈을 감고 있다가 앞으로 졸듯이 꾸벅 거리며 토구름을 한다. ⑪다시 흔들다 굿상 비껴 옆으로 오른발로 땅을 콱 밟으며 양손을 쫓는 시늉을 두 번 하고 토구름을 한다. ⑫돌아와 양중 앞으로 신칼을 휘돌리고 내리면서 제자리에 서면 장단이 멎는다. ⑬사설로 "오년마다 와서 용왕님네 오셔서... 선주들 여기서 절도 하고 하시지요” 하니 선주들이 와서 절을 한다. ⑭조무들에게 선주들 명잔 복잔을 주라고 하고 무녀는 소지를 한다. ⑮수부채장단에 수부무가를 하고 제물을 바다에 던져 뿌린다. ⑯양중들이"에루 지신아! 지신지신 울리자!” 하면 풍물을 치며 굿당으로 돌아와 신명나게 풍물을 치며 미지기, 오방진 등의 풍물진풀이를 하고 <당맞이거리>를 모두 마치고 골매기대를 앞세우고 제당으로 돌아와 마친다. <당맞이굿>에 나타난 춤은 내당굿에서 본격적으로 굿을 할 때와 달리 야외 마을굿터에서 연행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굿내용이 축약되어 연행하므로 춤 역시 맛보기식으로 추었다. 내용상으로 부정춤, 청보춤, 거무춤, 토구름춤 등이 있었지만 간단하게 추었기 때문에 다음 연행되는 굿거리(*)에서 소상히 밝히기로 한다. *부정굿- 굿청의 잡귀잡신을 물리치고 부정한 것들을 정화시키는 굿거리이다. 앉은거리와 선거리가 있는 경북지역은 부정굿이 독립된 굿거리로 연행하나 경남지역은 독립적으로 굿거리로 하지 않고 <제주집안굿>이나 <당맞이굿>에서 선거리로 간단히 연행한다. *비손- 무당이나 개인이 혼자서 치성(致誠)을 드리는 행위로 '손을 모아 빈다'는 뜻에서 ‘손빔’이라고도 한다. 비손에서 비는 행위인 축원덕담(祝願德談)은 ' 비나리'라고 한다. 노래와 춤·공수, 여타 복잡한 형식이 뒤따르고 장구·북·징·피리 등의 잡이들이 수반되는 의례를 <굿>이라 한다면, <비손>은 가무없이 간단히 정성만을 올린다. 정초의 안택(安宅)과 10월 상달고사, 그리고 집안에 환자가 생겼을 때 등에서 비손을 많이 하며, 소박하게 청수를 떠놓고 빌거나 시루떡을 준비하기도 한다. *골매기(골맥이)- ‘골(谷)’과 ‘액운을 막다’, ‘마을을 수호하다’라는 뜻으로, ‘골맥이 서낭’, ‘골맥이 할배’라고도 하며, 주로 경상도의 마을굿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지만 동해안 지방에서는 각 마을의 신으로서 동제의 대상신이 되고 있다. 그래서 김씨 할배, 이씨 할매 등으로 성이 붙어 인격신의 형태를 띠며, 할배나 할매는 조부(祖父)나 조모(祖母)라는 뜻이 아니라 조상(祖上)이라는 의미로 나무, 바위, 당집 등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모시고 있으며 웃당(상당)과 아랫당(하당) 또는 중당이 있는 마을도 있다. 별신굿에서는 언제나 굿당을 깨끗하게 하는 ‘부정굿’을 한 다음에 ‘청좌굿’을 진행한다. 청좌굿을 무당들은 ‘골맥이 청좌굿’이라고도 부른다. 청좌굿은 마을 당신(堂神)인 골맥이를 굿당에 맞이하는 굿거리이다. *골매기대- 별신굿에 쓰이는 신대는 각종 신이 대를 타고 내린다는 내림대로, 굿청 문 앞에 댓잎이 달린 긴 장대에 희 지전을 매달은 것으로 신대(너름대는 작은 것), 골매기대, 천왕대(제관두루마기를 함께 매달음) 등으로 모양은 같으나 굿의 쓰임에 따라 기능과 명칭은 다르다. *토구름- 무속은어로는 ‘신이 노하다’라는 뜻이지만, 동해안별신굿에서는 세습무인 무녀가 거무춤을 춘 다음 굿당을 향해 어포와 수건을 들고 허리를 굽혀 움찔하거나 구르는 듯한 모습이나 발을 콱 밟아 구르는 시늉으로 강신무들이 접신하는 것처럼 몸짓을 하고 난 후 어포춤을 추고 축원하는 과정을 말한다. *별비– 제가집이나 주민들이 굿을 연행하는 무녀에게 복채로 직접 주는 돈(화폐)을 말한다. *굿거리-‘굿거리’라고 하면 흔히 ‘굿거리장단’을 생각하게 되지만 굿판에서는 굿의 진행과정에 신을 불러 축원하고 오고 오신하는 독립단위의 굿으로 ‘거리’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즉 신암별신굿에서의 ‘굿’은 ‘상위개념의 굿’이고 연행내용에서 말하는 ‘부정굿’, ‘청좌굿’, ‘문굿’, ‘세존굿’ 하는 것들은 ‘하위개념의 굿’으로 ‘부정거리’, ‘청좌거리’ 등으로 해석하면 된다. <문굿>으로 굿청을 열기 위해 서막을 알리는 ‘진풀이춤’, ‘밟이춤’, ‘놀이칼춤’, ‘짝춤’ <문굿(문당굿)>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문을 열어서 신을 맞이하는 것이다. 문굿을 연행하며 문을 활짝 여는 것은 신들을 인간 세계로 영접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무당들의 예능실력 과시와 마을사람들이 무당들의 실력을 엿보는 거리라고도 할 정도로 무당들의 군무와 함께 모든 악기의 연주로 인해서 굿을 여는 신명의 분위기를 창출하는 데도 의미가 있다. 진행상 <문굿>은 마을의 수호신(골매기)을 있는 서낭당, 용왕당 등을 길놀이를 하면서 찾아가 당맞이굿을 모두 마치고 풍물을 치면서 제당 앞에 당도하여 굿청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문 앞에서 굿을 시작하는 의미의 굿거리이다.양중과 무당이 짝을 지어 짝춤을 추며 각각의 신들을 모시기 위해 문 앞에서 신명의 굿춤판을 벌이고 주민대표들이 문을 열어주면 굿청으로 들어가 내당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문굿>은 내당굿을 하기 전에 모든 무당들이 함께 문밖에서 ‘밟이춤’(*)을 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양중들은 모두 농악기를 들고 풍물을 연주하고 무녀들은 놀이칼을 들고 춤을 춘다.11시 30분(85분간) 원양중(주바리지)(*)이 장삼(활옷과 유사한 색동옷)에 갓을 쓰고 장고를 메고 앞장서면 양중들이 쌍호적에 길굿장단을 치면서 원으로 돌 때 무녀들도 뒤를 따라 모두 흰 수술을 댄 놀이칼을 양손에 들고 좌우치기, 뿌리고 어깨얹기 등으로 ‘놀이칼춤’을 추며 돈다. 풍물의 ‘진풀이춤’으로 8자진, 오방진 등으로 돌면서 "얼씨구! 좋다!” 추임새를 하면서 신명나게 푸너리장단에 춤을 추다가 다시 원으로 서면 행진을 멈추고 ‘밟이춤’ 대무(對舞)가 시작된다. 원 안으로 들어간 원양중 김종희가 장구를 높이 쳐들고 김동연 무녀가 짝이 되어 조너리장단(*)에 짝춤을 춘다. 조너리장단은 장구보다 징이 잔가락을 많이 치며 박자를 주도하는 것으로 징가락에 춤은 춘다고 봐야한다. ①조너리장단에 원무녀는 놀이칼을 높이 들고 흔들면서 양중이 높이 처든 장고와 마주하면 서로 미지기(마주보고 전진후진)를 한다. ②장고를 얼굴 앞에 세워 들고 자리를 바꿔 각자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장고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미지기로 함께 제자리로 물러난다. 즉 회전할 때는 장고를 세위 들고 전진후진할 때는 장고를 눕혀 하늘 높이 들고 춘다. ③이어서 그동안 구음소리만 하던 김동언 무녀가 문굿 무가를 부르면 다른 무녀들이 제자리에서 손만 흔든 다음 모두 원을 따라 흔들며 걸어 돌아간다. ④김영숙 무녀가 무가를 받아 소리를 하면 다시 원양중은 원 안으로 들어가 장단을 치고 원무녀는 놀이칼로 흔들며 마주보고 대무한다. 이때 밖에 있던 무녀들이 짝을 지어 등지고 좌우치기로 대무를 한다. ⑤장단이 빨라지면 원 안의 원양중은 장고를 밖에 내려놓고 들어와 원무녀와 서로 양팔을 펴들고 등지고 돈 다음 등지고 서서 같은 방향의 팔을 함께 들어 꺾고 반대 팔을 꺾어 들고 천천히 반복하다가 점차 빠르게 들고 점차 좌우치기로 흔든 다음 마주보며 잔걸음으로 돌면서 흔든다. 이때 원밖의 무녀들도 빠른 손신무관으로 춘다. ⑥술래잡기처럼 양중이 쫒고 무녀는 피하면서 춘 다음 무녀의 놀이칼을 양손으로 붙잡고 서로 돌고 반대로 돌고나서 멈춰서 양손을 늘어뜨려 좌우로 흔들다가 잡은 채로 서로 뒤집어 돈다. ⑦한 번 더 뒤집어 돌고 반대로 흔든 다음 뒤집기를 두 번 세 번 돈 다음 수술을 놓으면 무녀들 모두가 원으로 들어가 아주 빠른 손신무관을 추고 나간다. ⑧양중도 놀이칼을 들고 무녀가 한조씩 들어가 추고 나오면 다음 짝이 들어가 신명의 밟이춤을 한 번씩 춘다. 이때 추는 무관(舞冠, 춤사위)은 갈매무관, 돌머리무관, 겨드랑무관, 자치무관, 양사위치기무관, 도리깨무관, 까불무관, 비빔무관, 나비무관, 혼합한 손신무관 등을 춘다. 모두 한 번씩 추고나면 제당 문 앞으로 몰려간다. 문 안에 있던 마을 제관들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한다. 1분 더 신명의 춤을 추면 열어주겠다고 대답한다. 신명나게 추니 문을 열어주어 제당으로 들어간다. 제당 앞에 굿청에 서서 무가를 하고 절하기를 세 번 한 다음 부정물 가시기를 하고 버린다. 굿청 안 입구에 강신무인 손영만 남무가 신대를 잡고(원래는 마을의 강신무가 대받기를 하나 없어서) 김동언 무녀가 바라를 들고 작은 고사상을 차려놓고 대받이 고사를 지낸다. 마을의 제관들이 고사상에 절을 하고 무녀는 청보무가를 부른다. 점차 신이 오르면 대잡이가 신대를 바르르 떨면 신이 강림한 것이다. 신대를 들고 떨면서 마을 주민들을 머리 위를 스치고 양중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 제당 밖에서 안으로 신대를 넣고 흔들면서 몸을 부르르 떨고 절을 하면 마친다. 이렇게 오전 일정을 마치고 점심 후에 굿을 이어간다고 알리며 마을에서 차린 식당으로 가서 납세미조림(가제미), 톳무침, 미역무침에 전분을 푼 시래기콩나물국 등 토속음식이 짜지 않고 맵지 않고 싱싱하여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내당굿과 외당굿: 동해안 남부지역에 주로 구성된 연행구조로 내당굿은 굿의 전반부에 해당하며, 굿당을 정화하고 신들을 좌정시키고 신과 인간과의 만남과정을 풀어낸다. 조상과 집안의 여러 신들에게 자신과 자손의 번창 풍요, 안녕을 기원하고 무당자신을 위한 굿도 연행된다. 외당굿은 굿의 후반부에 해당하며, 굿이 진행되는 마을 전체의 번창과 풍요, 안녕을 기원하는 성격 위주로 진행되며, 극적 성격도 강화되어. 바다, 산, 땅, 나라전체와 관련된 신위들을 중심으로 연행하여 굿 참석자들에게 흥미를 제공하기도 한다.*밟이춤- 문굿에서 무당과 양중이 짝을 지어 ‘진풀이춤’, ‘짝춤’, 또는 ‘집단춤’으로 마당밟이하는 춤.*양중(바라지)- 동해안별신굿의 악사를 말하며, 무녀의 굿을 반주하고 가의 선율을 받아서 응답하는 일(지역에 따라 만수받이, 살대답이라고도 함)를 ‘바라지’라고도 한다. 대개는 무녀와 양중이 부부로 같은 굿거리를 거행하고 반주한다. 이 때 중심 양중을 ‘원양중’, ‘주(원)바라지’라 하며 장구를 잡고 나머지는 ‘옆(약)바라지’로 징, 꽹과리, 바라를 잡는다.*조너리장단과 대너리장단- 문당굿과 장수굿에서만 사용되는 장단으로, 3소박 4장단인데 문굿의 밟이춤 대무에 연주하며 징의 뒤를 막지 않고 장고처럼 잔가락을 많이 처서 춤가락을 맞춘다. 대너리장단은 조너리장단과 박자는 같으나 큰 박만 징 뒤를 막아 치는 것이 특징이다. 신암별신굿의 굿거리 순서와 내용 별신굿 전야에 1.제주집 안굿, 첫날에 2.당맞이굿, 3.문굿, 4.가망굿, 5.세존굿, 6.도둑잡이, 7.제석굿, 둘째날 8.성주굿, 9.부인굿, 10.손님굿, 11.천왕굿, 12.대왕굿, 셋째날 13.대신굿, 14.심청굿, 15.황제굿, 16.군웅굿, 넷째날 17.걸립굿, 18.용왕굿, 19.장수굿, 20.월래굿, 21. 꽃・등・뱃노래, 22.거리굿으로 프로그램에는 기록되어 있었으나 실제 굿판에서는 무녀들의 사정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프로그램에는 각 굿거리를 ‘굿’으로 표기하였으나 청신(請神)과 송신(送神)과정은 주로 굿당 밖에서 별도로 연행함으로 ‘굿’으로 표기하며, 굿당 안에서 연행하는 오신(娛神)과정은 내당굿과 외당굿의 하위개념으로 보아 ‘거리’로 바꿔 표기하기로 한다)1. 제주집안굿: 굿의 집사를 맡은 제주집의 가신(家神) 성주, 군웅, 세존, 조상님을 위한 굿거리2. 당맞이굿: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제당을 돌며 신을 청해 오는 굿거리3. 문굿: 굿청 문을 열고 굿을 시작하는 굿거리4. 가망거리: 신령들의 근원(根源)을 관장하여 굿문을 열고 자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굿거리5. 세존거리: 아이의 출산, 명복, 재복을 관장하는 세존을 위한 굿거리,6. 도둑잡이: 마을의 재물을 보호하고 손재를 막기 위한 남무들의 놀음 굿거리7. 제석거리: 바람과 기후를 관장하는 제석을 위한 굿거리8. 성주거리: 집안의 수호신인 성주신을 모시고 가정의 평안을 비는 굿거리9. 부인거리: 각 가정에 효부와 열녀가 나오기를 기원하는 굿거리10. 손님거리: 천연두신인 마마신을 위한 굿으로 질병과 재액을 막기 위한 굿거리11. 천왕거리: 천왕신에게 마을 안가태평을 기원하는 굿거리12. 대왕거리: 각 대왕들을 위하고 청하는 굿거리13. 대신거리: 무당의 조상신인 대신을 위한 굿거리14. 심청거리: 심청설화를 서사무가로 구연하는 거리로 마을 주민들의 안질방지와 눈을 밝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거리15. 황제거리: 환훤 황제에게 가축의 무병과 집안의 재복을 기원하는 굿거리16. 군웅거리: 군웅신에게 농사발복을 기원하는 굿거리17. 걸립거리: 무당의 무조신인 제면할머니를 위한 굿거리18. 용왕거리: 용왕신에게 해상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거리19. 장수거리: 여러 장수들의 위엄과 힘을 빌려 마을 액과 살을 막는 굿거리(놋동이를 입에 물고 장군신의 위엄을 보인다)20. 월래거리: 각 가정의 돌아가신 선대 조상을 위한 굿거리21. 꽃・등・뱃노래: 무구로 쓰인 꽃, 등, 배의 유래를 설명하고 송신의 의미를 담은 굿거리22. 거리굿: 남무의 일인극으로 잡귀 잡신들을 풀어먹여 보내는 굿거리 동해안 별신굿의 각 굿거리 연행의 기본구조와 변형구조 동해안별신굿의 각 굿거리는 대부분 연행의 6단계 기본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①푸너리장단의 푸너리춤으로 시작하여 부채와 수건춤을 추고 제당에 절을 하면 나면, ②청보장단에 청보무가를 부르면서 간간히 발림으로 청보춤을 춘다. ③무가를 마치면 무녀가 "우여차! 가망님네 놀고 씨고 가잔다!”라고 하면 양중들이 뒤를 받아서 괴성을 지르듯이 소리를 받으며 거무장단에 거무춤을 3장으로 ‘느진거무춤’(중모리형), ‘거무춤’(굿거리형), ‘당거무춤’(자진모리형)을 추고나면, ④어포(명태포)을 들고 모름채 장단에 토구름춤과 어포춤을 춘다. ⑤축원무가와 팔도민요, 가요 등을 부르고, ⑥사자풀이채(장단)에 술잔과 신칼을 들고 수부사자무가를 부르고 마친다. 그러나 변형구조는 첫째, 청보장단 대신 제마수장단으로 무가를 하는 <심청거리>, <세존거리>, <걸립거리>, <손님거리> 등 4가지는 긴 서사무가를 부르는 굿거리이다. 둘째, <조상월래거리>는 별신굿이 아니라 오구굿의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엇청보장단을 쓴다. 엇청보 1장은 푸너리를 친 다음에 시작하여 양중이 "이여어~얼씨구나!”라고 구음바라지를 하면, 이를 받아 무녀가 무가를 시작하며, 장구와 징 반주에서 징은 뒷면을 막고 나직이 친다. 셋째, 푸너리장단을 사용하지 않는 <도가집굿(제주집안굿)>, <꽃노래>, <뱃노래>, <등노래>, <대거리>가 있다. 넷째, 조너리장단과 대너리장단은 <문굿(문당굿)>, <장수거리>에서 쓰인다. <문굿>에서 무녀와 양중의 밟이춤의 반주장단이다. 오신(娛神)과정의 본격적인 굿거리의 시작 <가망거리>, <제석거리>, <세존거리> 청신과정을 마치면 이제 본격적인 오신과정의 굿거리가 연행된다. 오신의 첫 거리는 <가망거리>이다. 가망신은 무속에서 가장 근원이 되는 신령의 이름이다. <가망거리>는 신령들의 근원(根源)을 관장하여 굿문을 열고 신령과 인간이 만날 수 있게 하는 굿거리로 항상 큰 굿의 초반에 행하여진다. 굿당 밖에 가설한 식당에서 주민들(신암마을부녀회)이 마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니 13시 30분(90분간)에 <가망거리>가 시작되었다. 김동연 무녀(동해안별신굿 전수조교)와 김정희 양중(동해안별신굿 전수조교)이 굿을 연행하였다. 다음은 프로그램의 순서를 바꾸어 <제석거리>를 연행하게 되었는데 15시 7분(90분간)부터 홍효진 무녀(전수생)와 정연락 양중(전수조교)이 연행하였다. 제석신은 재복을 관장하는 신이며, 세존신은 아이의 잉태, 출산, 성장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시고 있다. 흔히 제석과 세존은 같은 신으로 혼용하기도 하지만 동해안별신굿에서는 굿거리가 나누어져 있다. <제석거리>는 앞서 밝힌 6단계의 기본구조로 푸너리춤, 청보무가와 춤, 거무춤, 토구름춤, 어포춤, 축원민요, 수부물림 등으로 연행하였다. 이어서 <세존거리>와 <도둑잡이거리>는 16시 37분(165분간)부터 김영숙무녀(전수조교)와 김용택 양중(보유자)과 모든 양중들이 연행하였다. 오신과정에 나타난 굿거리에서 축원하는 신과 무가와 사설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연행구조를 보면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기본구조와 변형구조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춤 관련에서는 굿거리마다의 유사성이 많아 각 굿거리마다의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기본구조의 공통성과 연행자의 특수성을 감안해서 다음호에 종합적으로 정립하기로 한다. 또한 변형구조로 되어있는 <세존거리>는 그다음 호에 칠암별신굿에서 연행되는 내용과 통합 분석하여 춤의 형식을 제시하기로 한다. <성주거리>는 성주신을 모시고 해학적으로 풀어나간 다양한 ‘흉내춤’이 일품 <성주거리>는 집안의 수호신인 성주신을 모시고 가정의 평안을 비는 굿거리로, 성주는 집안의 대주를 지키는 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19시 22분 김동언 무녀와 김동열 양중이 주도한 성주거리는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하거나 복을 빌 때 부르던 성주풀이 내력을 굿판에 해학적으로 전개하였다. 먼저 푸너리춤으로 굿을 시작하여 청보무가로 이어지는 기본구조로지만, 내용면에서는 독특한 연행으로 굿판의 첫날 일정의 클라이맥스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성주내력의 무가내용은 "이 동네 자손들 명을 주고 복을 주고 안가태평 부귀공명 시화연풍 국태민안 시킬 때 어느 가정에 성주가 없을까요? 집에 계시는 성주님네 대들보 대성주 천년성주 만년성주요 일도본당에 당상에 자리 잡고 계시는 대들보 대성주. 오늘은 성주를 고치고 성주를 자리 좌정시켜 붙이고 모시고 성주님을 모실 때 본이 어디고?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레라. 제비원에서 솔씨를 받아 산천에 던졌더니 낮에는 볕은 받고 밤이면 이슬 받아 산신님네 북부도고 용왕님네 도움 받아 낙낙장송이 되었구나!...”로 이어진다. 계속해서 대목장의 톱질 흉내, 풀무질하는 소리와 동작, 입술을 데어 놀란 입과 눈 연기, 톱니벼르기와 물에 당금질 소리와 흉내, 톱질노래와 다양한 톱질소리 흉내 등으로 웃고 즐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가꾸어 큰 재목으로 키워서 통나무 잘라 대들보 만들고 집을 지은 뒤 세간을 들여놓은 뒤 성주님을 모시고 풍요롭고 다복한 살림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그리고 "우여차 성주님네 모시고 놀고 씨고 가자 으아!” 하며 거무춤을 추고 굿당 안으로 들어가 소지하고 합장 재배한 다음 명태포 뭉치를 들고 나와 모름채(휘모리형에서 단모리로 끝남)장단에 신칼과 어포춤을 춘다. 다시 굿당 안으로 들어가 어포를 내려놓고 한지로 된 성주신위를 막대 끝에 얹어 제관에게 대들보에 붙이게 하며 양손을 비비며 축원한다. 다시 시도하여 천장 벽에 붙자 성주님이 집안에 잘 붙었다고 양손을 흔들며 허튼춤을 춘다. 이어서 풍농을 기원하는 농부가를 부르면서 무녀들이 모두 나와 모내기 김매기 농사 흉내를 낸다. 또한 농악을 모방하는 춤으로 꽹과리로 버꾸춤 흉내(농악기를 굿판에 사용할 수 없어 반주악기인 쇠로 대신함), 신칼을 머리에 대고 신칼의 지전을 흔들면서 상쇠 부포춤 흉내, 부채에 수건을 매어 흔들면서 상모춤 흉내를 내며 농악의 흥겨움과 풍년을 기원한다. 주민들 앞으로 나와 이제 성주님의 덕으로 집안이 평안하니 다음은 풍년들기를 기원한다면서 농부가를 부르면 다른 조무들이 나와 함께 돌아가며 부른다. 꽹과리로 소고춤 군무로 흉내(농악기를 굿판에 사용할 수 없어 반주악기인 쇠로 대신함)로 소고 기본치기로 돌기, 소고 발찍고 제자리돌기, 안쪽보고 앉아 땅 찍고 치기, 원으로 돌며 앉자 땅 찍고 발차며 돌기 등으로 소고춤을 춘다. 다음에 독무로 홍효진 무녀가 부채 끝에 수건을 두 개를 이어 매달아 손으로 들고 채상 상모춤 흉내로 수평 휘돌리며 돌기, 제자리에서 좌우로 뛰며 좌우∞자 돌리기, 앞뒤로 뛰어나갔다 물러나며 휘돌리며 앞으로 꺾기, 앉았다 뛰며 휘돌리기, 제자리에 빠르게 앉았다 일어서며 휘돌리기로 마무리 한 다음 휘돌리며 원으로 돌다가 맴돌이춤을 뱅글뱅글 돈다. 이어서 다시 12발 상모 흉내춤으로 천천히 긴 12발 상모를 천천히 돌리며 원을 크게 돈 다음 제자리에서 크게 흔들다가 앉으며 돌린다. 앉아서 돌리기, 좌우로 ∞자 돌리기, 옆쪽으로 누어돌리기와 반대쪽으로 바꿔 돌리기, 박수치기 유도하기, 귀 뒤에 손을 대고 박수소리 크게 나는지 확인하기, 일어나서 좌우치기, 맴돌이로 빨리 돌리기, 다시 ∞자 돌리기, 인사하기로 마무리 짓는다. 김동언 무녀가 꽹과리를 들고 나와 다양한 상쇠가락을 친 다음 상쇠잡이들의 춤을 흉내 낸다. 이어서 축원민요로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로 창부타령 등 여러 민요를 부르고 가요도 부른다, 마지막 축원무가를 부르고 빠른 수부채가락으로 술잔을 들고 수부물림으로 마친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신암별신굿이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첫날 굿 7거리를 마쳤다. 인구 1000명이 산다는 아담한 어촌마을에 5년마다 열리는 풍어제에 온 마을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물론 굿판에 동참하는 이들이 마을의 할머니와 주부들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러나 찬조금을 내어 줄에 걸려있는 찬조자들은 거의 남자들이고 마을의 이장과 제관, 노인회장 등 직책으로 참여한 이들도 대부분 남자들이다. 부녀회에서 가설식당을 차려 온종일 무당들과 주민들과 각지에서 연구차 찾아온 학자와 연구자들이다. 겨울의 끝자락이지만 아직 추위와 바닷바람을 견디며 굿당 앞에서 연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굿판과 구경판을 조립식으로 천막과 단열바닥판과 난방시설과 음향시설 등 닷새 동안의 축제를 불편 없이 연행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놀라운 것은 굿거리마다 주민들이 무녀의 가슴 띠에 꽂아주는 별비가 생각보다 많았는데 만원권들로 띠가 미어질 정도였다. 할머니들, 주민대표, 주부들이 수시로 동참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축원해주는 감사의 뜻으로 별비를 내는 마음들이었다. 풍어제의 의미를 가진 별신굿이며 가정의 평안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음들이 모여서 신명의 굿판이었고 행복한 놀이판이었다. 다음 호에는 둘째날과 셋째날의 굿거리 내용을 살피고 기본구조의 ‘푸너리춤’과 ‘거무춤’에 대한 집중분석으로 춤의 연행구성을 최초로 정리하며, 변형구조의 굿거리의 특수한 춤들도 고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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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국 전통춤 계승과 발전방향문화론적 시각과 미래 방안 1. 전통춤 패러다임과 계승 문제의 접근방법 문화는 시대가 변하고 사회환경이 변함에 따라 새롭게 적응하면서 변천한다. 따라서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발전하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 형성되며 춤의 양상(樣相)과 양태(樣態)도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변모(變貌)한다.서양춤의 변모는 고대의 의식적(儀式的)인 리투얼 댄스(Ritual Dance)로부터 중세 포크댄스(folk dance)와 코트댄스(court dance), 절제와 균형의 합일을 강조하는 18세기 클래식 발레(Classical Ballet), 꿈과 이상의 도약을 향한 19세기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의 주관적인 형식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창조된 모던 댄스(Modern Dance)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쳐 왔다. 한국춤 역시 고대의 제천의식춤(祭天儀式舞), 중세의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민속춤(民俗舞), 근세의 궁중춤(宮中舞), 민속춤(民俗舞),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현대의 전통춤(傳統舞), 창작춤(創作舞), 외래춤(外來舞) 등 각 시대별로 주요한 패러다임(paradigm)이 존재해 왔으며, 또 각 시대별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구시대의 패러다임이 대체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편의상 우리는 근대이전 시대의 전통양식을 갖춘 춤들을 통틀어 ‘전통춤’이라고 하고 근대 이후에 유입된 발레와 모던댄스를 ‘외래춤(외국춤)’으로 구분한다. ‘한국춤’은 협의로 전통춤과 한국창작춤을 포함하여 말하기도 하고, 광의로 한국에서 한국인이 추는 외래춤까지도 포괄하기도 한다. 명칭도 한때는 ‘신무용’, ‘고전무용’, ‘한국무용’, ‘민속무용’, ‘전통무용’ 등으로 두서없이 부르기도 하였고, ‘무용’과 ‘춤’도 혼용하여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근대는 갑오경장 이후 서구 열강들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모든 문물이 서서히 유입되고 변화양상을 보이면서 1902년 협률사의 등장으로 과거에 궁중과 기방 등에서 추던 춤들이 최초로 극장공간과 공연문화가 태동하면서 극장춤으로 시도되었다. 외국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1920년대 이후는 발레와 현대춤이 자리 잡아 가면서 전통춤과 창작한국춤과 함께 한국춤계를 주도하며 저변을 확대해갔다.이에 근현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전통춤의 계승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문화론적 시각에서 계승문제를 접근하고 미래 발전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전통춤 계승에 관한 다양한 문제점 중에서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제기하여 계승문제를 파악하기로 한다.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2. 전통춤 현황과 접근배경 1) 전통춤 종류와 무형문화재 지정종목 현황 한국의 전통춤도 시대변천에 따라 부침(浮沈)을 계속하면서 현대까지 전승되었다. 이상은 전통춤 분류와 몇몇 종목의 예시일 뿐이고 근현대로 전승한 궁중춤 50여종, 무당들의 무구춤 300여종, 재인청춤(화성 50여종, 안성향당춤 40여종)과 전통예인들이 전승한 춤(한성준 80여종, 김인호 30여종, 김덕명 20여종) 등등 정병호 정리 370여종을 포함한 필자 조사 1000여종의 전승춤 등 수없이 많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강강술래(8호, 소리춤), 진주검무(12호), 승무(27호), 승전무(21호), 처용무(39호), 학연화대 합설무(40호), 태평무(92호), 살풀이춤(97호) 등 8종이며,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한량무(서울45호), 살풀이춤(서울46호), 동래학춤(부산3호), 동래고무(부산10호), 동래한량춤(부산14호), 승무·살풀이춤(경기8호), 안성향당무(경기34호), 고깔소고춤(경기56호), 승무(대전15호), 입춤(대전21호), 살풀이춤(대전20호), 승무(충남27호), 살풀이춤(대구9호), 호남살풀이춤(전북15호), 한량춤(전북44호), 호남산조춤(전북47호), 예기무(전북48호), 진주한량무(경남3호), 진주포구락(경남12호), 진주교방굿거리춤(경남21호), 범패와 작법무(인천10호), 날뫼북춤(대구2호), 수건춤(18호), 진도북춤(전남18호), 화관무(황해4호), 평양검무(펑남1호), 부채춤(평남3호) 등 27종이 있다. 그밖에도 중국 동북3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조선족춤 중에도 많은 춤종목이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다. 즉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족농악무(象帽舞、乞粒舞)를 비롯하여 길림성의 조선족아박무(牙拍舞, 안도현), 조선족부채춤(연변주), 조선족칼춤(도문시), 조선족원고무(도문시), 조선족학춤(안도현), 조선족접시춤(훈춘시), 조선족장고무(도문시), 조선족손북춤(手鼓舞, 도문시), 조선족방치춤(棒槌舞, 도문시), 조선족상모춤(연변주, 국가급), 조선족삼노인(화룡시), 조선족탈춤(도문시), 조선족칼춤(연변주), 조선족찰떡춤(떡메춤 打糕舞, 연변주), 요녕성의 조선족농악무(农乐舞, 乞粒舞, 본계), 조선족탈춤(철령), 흑룡강성의 조선족접시춤(碟子舞, 감남현), 조선족물동이춤(顶水舞, 목단강시), 조선족아박무(牙拍舞, 해림시) 등 20여종이 지정되어 있다(2012년 목록). 2) 전통춤 계승문제의 접근배경전통춤 계승문제를 분석하는 도구로 <문화의 5대 특성>과 <문화인류학적 3대 시각>에서 전통춤의 계승문제를 분석하고 나타난 문제점을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는 발전방향을 제시하기로 한다. 현대생활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문화(culture)’는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 5대 특성(속성)을 가진다.① 학습성(후천성): 인간의 문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된다는 것이다. ② 공유성: 인간은 서로 공통된 행동과 생활양식, 즉 서로 고유한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③ 축적성: 문화는 서로 발달하고 상호작용하며 축적되면서 진보하게 된다.④ 변동성(다양성): 축적되는 문화를 통해서 항상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변동하여 발전한다.⑤ 전체성(통합성): 문화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비슷하게 연관되어 통합성을 지닌다. 또한 문화인류학의 문화에 대한 시각에는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또는 cultural relativism)’ 그리고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이 있다(한상복 외, l985). ①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문화는 생활양식의 여러 측면, 즉 정치, 경제, 법률, 가족, 친족, 종교, 예술, 관습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그 민족의 생활관습이라든가 사고방식, 생산양식, 인간관계, 신앙생활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그 문화와 관련된 많은 항목들과 총체적으로 연관지어 설명해야 의미관련(relevance)을 좀 더 명확하고 본질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승무는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무엇으로 추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여야 하는데 흔히 춤사위와 계보 수준에서 머물면 그 춤의 총체적인 면을 알 수가 없이 춤동작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cultural relativism)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회적 맥락과 그 민족의 생활사(life history)를 이해하려는 것으로 타문화를 함부로 평가 비하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자세이다. 어느 민족의 문화이건 각기 역사와 가치,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문화에 대해 편견이나 ‘자민족중심주의(문화국수주의, ethnocentrism)’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은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는 아무리 미개민족의 하찮은 민속춤이라 할지라도 예술적으로 뛰어난 발레와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거나 자기 민족춤은 우수하고 타민족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동안 근현대기를 지나면서 한국전통문화를 우월하게 놓거나 비하하는 수많은 사례를 겪으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전통춤에서도 한국과 여타 아시아국의 춤에 대해 비교우위나 비하의식이 남아있고, 무형문화재 지정춤과 비지정춤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서 추종과 외면현상으로 수많은 춤들이 소멸되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흔히 궁중춤은 품격이 있고 민간춤은 저급하다는 시각과 문화재 지정춤은 우수하고 비지정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은 그릇된 태도이며 다같이 소중한 한국전통춤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③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비교론적 시각은 두 지역 이상의 민족이나 지역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여 유사성 또는 공통점과 상이성을 명확히 규명하여 ‘보편화(普遍化, generalization)’하고 ‘특정화(特定化, specification)’하는 것이다. 즉 인간사회와 문화의 본질을 ‘일반화(一般化)’하는 관점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영숙살풀이춤(재인계, 서울중부지역)과 이매방살풀이춤(기방계, 호남지역), 김숙자살풀이춤(신당계, 경기남부지역) 등의 보편성과 일반성, 지역성, 공통성, 상이성 등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3. 전통춤 계승의 문제점 1)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볼 때 전통춤은 이러한 특성에 맞게 잘 전승하고 있는지 파악해 볼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전통춤 계승에서 나타난 문제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 –정책과 여과능력 부재 국권마저 상실했던 근대시기에 아무런 대응과 여과 없이 일본을 통해 서구문명이 유입되었다. 1926년 이시이바꾸(石井漠)을 통해 서구 현대무용이 유입되었고, 최승희, 조택원들이 제자로 일본유학을 다녀와 한국무용계를 주도하였다. 미국을 위시하여 유럽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레와 현대무용이 유입되어 한국무용계에는 한국무용(전통춤 포함), 현대무용, 발레의 삼분법으로 대학무용학과가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 열등주의와 사대주의 19세기말 갑오경장(1894)으로 구시대적 문물제도를 버리고 서양의 법식을 본받아 새 국가체제를 확립하려는 개혁을 기점으로 근대화는 점차적으로 정착되어갔으며, 한편에서는 한국 사회의 내재적 사정을 반영한 측면을 중시하였고 그것은 민족적 자각의 발로가 되어 민족주의가 발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문화의 유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힘입어 ‘신무용’이 ‘예술’로 인정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전통시대의 춤을 ‘비예술(非藝術)’로 기녀나 무당이나 민간인들이 추는 낡고 촌스런 문화로 무시하는 경향도 팽배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민족주의의식이 깨어나 최남선, 손진태, 송석하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민속문화를 연구하고 민족자각 의식을 일깨우는 노력을 하였고, 신무용에 대응하는 전통춤을 발굴하고 무대화하는 노력도 미약하나 발현되기도 하였다. 1902년 협률사와 1907년 광무대 등에서 재인청출신 김인호와 뒤를 이은 한성준 등이 전통춤의 무대화를 위해 기녀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지도하여 무대에 지속적으로 올리고 정립하였다. 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원형전수와 폐쇄적 교육 한국의 전통적 교육방식은 도제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능분야 역시 스승의 독창적 비법을 전수받아 구전심수(口傳心授)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똑똑한 제자들은 스승의 기법을 배우고 자기개발을 통해 더욱 문화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켜나갔다. 그런데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된 이후로는 ‘원형전수’라는 미명하에 스승의 기법을 한 치라도 변화시키면 위법이라고 하여 문화의 발전지체 현상 속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매방 승무와 살풀이춤을 순서 하나라도 틀리면 큰 죄를 짓는 국가문화적 구조 속에 살고 있다. 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창조적 계승의 원천봉쇄 해방 후에는 더 개방적이어서 미국과 유럽등지에서 외래문화가 직수입되어 이전보다 수용과 대응문제에서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아 왔다.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법률 제961호)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50여 년 동안 문화재보호법에 안주하여 특혜를 누리면서 지내왔지만 지정되지 못한 수많은 전통춤들은 반대로 더 소외되고 인멸되는 비극을 잉태하였다. 게다가 ‘원형보존’이라는 무형문화재법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어 일방적 전수만이 지속되면서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 변화해가는 현대문화와 세계화에 더욱더 멀어지고 대한민국시대의 전통춤을 창조해내지 못하는 편식과 전통문화적 암흑기를 맞이하고 있다. 2) 제도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① 무형문화재 제도 지정당시의 문제-전통문화의 소멸위기-국가관리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근대 국제정세의 서세동점(西勢東占)과 근현대화로 인한 ‘전통문화유산의 소멸위기’를 극복하려는 시급성 때문이었다. ② 무형문화재 제도 현재의 문제-‘원형’보존의 박제화-‘전형’ 개념도입현재는 ‘문화원형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상 전승과 평가의 기준이 되는 ‘문화원형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이다. 원형(原形)과 원형(原型)은 있긴 있으나 고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문화의 속성은 원형질(原形質)은 있으나 형태(形態)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무형(無形)문화재인 것이다. 문화원형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해마다 변화된 형태를 남기면서 ‘성장(成長)하는 생명체(生命體)’와 같은 것이다. 시간의 흔적은 있으나 고정된 형태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의 ‘시형(時形) 또는 시형(時型)’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된 지 50여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보존전승이라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비지정문화재의 무관심과 소외현상도 심화되는 역기능도 나타나고 있으며, 지정종목도 ‘원형전승’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혀 퇴보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2015년 다시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되면서 ‘원형(原形)’논리에서 ‘전형(典型)’으로 그동안 지나치게 박제화 되었던 무형문화재의 발전변모의 가능성을 담보하면서 유네스코 무형유산 운영기준과 연계한 법안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근본적으로 전통시대의 문화 변동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하고 장기적인 변화였다. 이러한 정적인 문화환경에 살아온 한국인은 근대 서구문명의 범람과 현대화 과정에서 동적인 문화변동에 대처능력도 미흡했고, 보수적인 시각으로 개혁에 미온적이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도제식으로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으로 전수받아온 장인정신은 변화를 부정하고 자연발생적이고 수동적인 전승에 안주하여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일각의 전승 성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4. 전통춤의 미래 발전 방향 1) 전통춤에 대한 문화론적 발전 방향① 문화에 대한 3대 시각인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을 견지해야 한다. 특히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으로 1000여종에 이르는 비지정 춤에 대한 관심과 전승에 지정춤과 동격으로 전승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화, 무대화, 전승력을 키워야 한다. ② 문화의 5대 특성인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의 입장에서 발전시킨다. 특히 변동성(다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제는 ‘원형’보다는 ‘전형’의 개념으로 발전적인 방향모색이 필요하다. 전형개념에는 ‘원형’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가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최초 전수 당시의 춤을 기본으로 간직하며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발전적인 노역을 경주하는 이중적이고 양면적 전승이 필요하다. 이것이 또한 축적성이며 역사성이 되어간다. 2) 전통춤에 대한 원론적 발전 방향 ① 삼원적(三元的) 전승방향 국제로 시야를 넓혀 한국과 가까이는 한중일, 그리고 세계라는 차원에서 볼 때 결국 삼원적(三元的)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한국의 전통춤을 원형대로 지켜나가는 일(원형적 전승), 전통춤을 현시대에 맞게 발전시켜나가는 일(발전적 전승), 세계가 하나로 집약되고 가까워지는 현대사회에 세계춤과 함께할 수 있는 예술춤을 창조해 나가는 일(창조적 전승)이다. ② 세계화 방향 지금까지 전통문화는 「토착화」에 주력했다면 이후는 세계적인 「보편화」가 과제이다. 소멸되던 전통춤은 일차적으로 한국화(韓國化)작업이었다. 글로벌시대에는 세계화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이다. 주체성이 ‘국내적’(한국문화, 한국춤)이라면 세계성은 ‘국제적’(국제문화, 국제춤)이다. 주체성이 자기를 지키는 ‘보수’라면 세계성은 자문화와는 별개로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이다. 또 문화논리로 보면 주체성은 ‘전통성, 수구성, 독창성’이고 세계성은 ‘외래성, 통합성, 전파성’에 비유된다. 즉 주체성(국내문화)과 세계성(국제문화)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두 명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상반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에서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문화수입이 문화수출보다 비중이 더 컸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국제경쟁력 측면에서 보면 여태 밑지며 살아왔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만 급급했지 우리문화를 세계시장에 내세우는 노력은 미흡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비로소 ‘한류문화, K-culture’(K-pop, 한국음식, 화장품, 드라마 등)가 세계무대에 전파되기 시작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전통춤이 국내적으로 스포츠댄스, 힙합 등에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 일과 더불어 ‘한류춤, K-dance’로서 세계무대로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한다. ③ 대한민국시대 신전통춤의 창조 노력 5천년의 한국 문화사에서 전통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도자기문화를 살펴보면 선사시대 토기에서 고려시대 상감청자를 거쳐 조선시대의 백자기로 창조하여 찬란한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전통춤도 시대별로 다양한 춤들이 창조되고 전승되었다. 근세말 효명세자는 20종의 궁중춤을 창조했다. 김인호와 한성준은 100여종의 전통춤을 정립하여 전승시켰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국무용가들은 대한민국시대 전통춤을 창조 또는 재창조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시대나 근대의 과거춤에 매달려 미래춤을 창조하는데 소홀히 했다. 우리보다 북한은 전통춤은 무시했지만 민족적인 색채를 띤 새로운 민속춤을 부단히 창출했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가 전통고수에 매달리는 동안 북한은 재창조에 매달렸다.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신전통춤, 재창조춤 등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김백봉 부채춤은 세계무대에서는 한국민속춤으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통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신전통춤들이 쏟아져 나와야 미래국가시대가 도래했을 때 대한민국시대에 찬란한 전통춤들이 창조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문화(춤)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생명력(전승력)을 지니고 진화하며 오랜 동안 전승하게 되는데 문화의 속성에서 벗어나면 소멸된다.”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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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1)<br>김진홍 명인의 '동래한량춤' 춤사위동래한량무 동래한량춤은 동래의 지역색이 강하고, 독특한 춤가락이 가미된 남성춤이다. 이 춤은 예로부터 소문난 명무들이 많아서 춤의 고장으로 불리우는 동래지역의 한량들이 추었던 춤이다. 전통적 극형식의 한량무는 경망과 기품, 진지함과 해학성을 넘나들며 해학과 풍자를 담아낸다. 능수능란한 자연스런 몸의 흐름에 따라서 흥과 한을 표출하여 춤의 완성도를 극대화 한다. 한국 남성춤만이 가지는 역동성과 멋이 담긴 춤사위가 지역마다 추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다. 경남지역 진주교방 계열의 김덕명류, 서울경기 지역 한성준류, 김인호 계열의 이동안류, 김덕순 계열의 김숙자류를 들 수 있다. '문장원류 한량춤'은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고, 김진홍이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동래한량무는 동래야류와 동래학춤이 근간이 되어 만들어 졌으며, 다른 지역 한량무보다 풍류의 본질인 놀이적 요소와 자연친화력 요소가 내재된 자유로운 유희성을 담보하고 있다. 김진홍의 '동래한량춤'은 경상도 지역 특유의 배김사위를 구사하는 덧뵈기춤이 특징이다. 이매방의 초기 제자인 김진홍은 1935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메이지유신의 소산인 신문명·신문화가 꽃피었던 오사카의 도시문화 속에서 서구식 예술장르를 접한다. 1940년대 초반 귀국하여 부산 범일동에 안착, 6.25 전쟁이후 부산을 고향 삼아 정착한다. 이매방과 사승관계를 맺고 전통춤을 사사받는다. 한편 '동래야류'의 예능보유자 문장원 문하에서 '덧뵈기춤'과 '한량무'를 배웠다. 김진홍의 동래한량무는 유장미와 풍류적 의미가 짙게 배인 덧배기 춤사위가 일품이다. 특히 춤사위의 호흡이 맺고 풀리는 원리를 가지면서 그 안에서 자유로운 즉흥성이 조화롭게 순환된다. 무대 형식보다는 마당에서 더욱 돋보이는 춤사위를 펼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김진홍(1935~ ) 1935년 경남 하동 출생 1951년 (부산)무용콩클대회 '남방춤' 입상(부산 동구 범일동 삼일극장) 이매방에게 승무 사사 이동안에게 태평무,진쇠춤 사사 1987년 승무 이수자 1998년 이매방류 살풀이 이수자 2006년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후보 선정 2010년 부산시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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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의 지역춤, 부산·경남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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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3김덕명의 전통춤은 양산지역의 사찰(寺刹)과 권번(券番)에서 전승하던 독특한 춤들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후학들에게 전수시켰다. 더구나 사찰과 권번은 수행도장과 세속이라는 서로 상반된 환경이기에 어울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김덕명의 춤은 그런 상반된 춤 세계를 모두 포용하면서 조화를 이루면서도 남성적이고 영남적이고 사찰적인 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 김덕명의 춤의 장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경남지방의 민속을 발굴하고 복원하고 전수하는 탁월한 악가무의 재능까지 겸비한 예인이며 재인이며 기인이었다. 이제 그가 남긴 춤과 민속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사찰계춤(4종), 기방계춤(11종), 민간계춤(13종) 3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1. 사찰계춤김덕명의 사찰계춤을 전승한 통도사는 경남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자리한 사찰로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하지만 전승계보는 조선말기 철종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魚山僧)는 알 수 없으며 계보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고종시대의 이월호(李月浩, 1880~ ?)로부터 김설암(金雪岩, 1885~ ?)→신경수(新京壽, 1893~ 1965)→양대응(梁大應, 1897~ 1972), 그리고 김덕명에게 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 양산사찰학춤양산학춤은 1880년대 통도사의 이월호스님으로부터 사찰계에서 민간재인계로 4갈래로 전승되었다. ①김설암-신경수-양대응으로 사찰계 전승에서 민간재인 김덕명으로, ②사찰관련 민간예인계의 김두식(金斗植)-안화주(安化周, 1894- 1965)-황종열(黃鐘烈, 1897-1957)에서 김덕명으로, ③이주서-서상근에게 전승은 단절되었고. ④이주서–김동원 전승은 동래학춤으로 전승되었다.이렇게 양산에서 유일하게 통합전승된 김덕명 양산학춤은 그 사찰계 원형성과 민간재인계의 독특한 덧배기 춤사위와 교방계의 섬세한 바디(성향)가 깃들여져 예술성이 높은 춤으로 전승되었다. 학춤의 유래는 신라 선덕여왕 15년(AD646) 통도사가 창건된 이래 수륙재, 영산재, 종무대재 때 의례행사무로 승려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왔다고 전한다. 김덕명의 양산사찰학춤은 24가지 춤사위를 4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단계별 의미로 학을 표현하면서 춤사위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1단계> 자연의 새가 하늘을 날고 땅으로 내려앉는다. 먹이를 찾기 위해 동료를 위협하며 존재감을 알린다. <2단계> 먹이를 찾기 위해 사방을 살피며 걷는다. 날개 짓하며 돌고 먹이를 고르며 으쓱인다. <3단계> 학은 먹이를 집고 죽이고 먹는다. 배부른 학은 쉴 터를 찾아 걸으며 따뜻한 햇살에 몸을 맡기니 졸음이 온다. 주위 소음으로 깜짝 놀란 학은 일어서면서 기지개 편다. <4단계> 동료 학과 짝을 이루고 끌어 주며 동료에게 먹이를 찍어 먹여주고 노닐다 날아간다. 양산사찰학춤은 사대부차림의 모습에서 학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갓과 도포자락에서 나타나는 우아한 학의 날개 짓, 몸짓 등에서 학의 동태가 사실적으로 전달된다. 하체중심에서 이루어지는 도약과 집중, 배김새 등 굵직한 남성의 멋이 내재된 춤사위는 학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박계현의 박사학위 논문발췌) 2) 지성승무지성승무는 일반적으로 성행하는 승무와 다른 의미를 지닌 독특한 춤이다. 춤의 근원은 인간중심적 구도, 순도한 도승과 상좌간의 기구한 운명적 사연으로 소산한 전통 불교 춤이다. 검정 승복에 붉은 가사(袈裟)의 강렬한 구도(求道)의 여한(餘恨)으로 중생구제의 부처님이 수행한 수많은 선행과 공덕, 정진 수행을 찬미하는 불교의 정통춤 지성승무는 장엄하면서도 신성한 몸놀림으로 재현되고 있다. 수도승이 수행 길목에서 부모를 잃은 동자를 구해 등에 업고 토굴로 돌아와 불도성상 십여년에 열반하신 스님의 액운을 풀어 소생케 하고 상좌는 스님과의 운명적인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픈 숙명을 적(赤)과 흑(黑)의 대비로 보여주는 춤사위가 전율스럽기까지 하며, 절정에 다달아 검은 허울, 붉은 허울 벗어 던지고 미친듯이 북을 두드리며 흰 적삼이 꿈결처럼 너울거리는 정서가 강렬한 춤이다. 춤의 순서는 <염불장단춤>꿈에서 깨어나서 스님을 살리고 떠나야하는 슬픔으로 흐느끼며 슬픔을 억제하는 춤사위다. <도드리장단춤> 상좌가 스님의 움직임을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이다. 움직이는 스님에게 다가설 수 없는 괴로움이 묻어나온다. <타령장단춤>꿈속에 나타난 도승이 가르친 소생의 춤이다. 타령 춤을 출 때 스님이 좌정하기 시작하며 상좌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자진타령장단춤> 차츰 깨어나는 스님의 모습을 장삼자락 사이로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다. <굿거리장단춤> 스님이 좌정하니 희비가 엇갈리며 떠날 준비를 하고 북을 울린다. 장삼–가사–홍띠–염주-고깔 등을 차례로 북에 걸은 후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울면서 떠난다. 이 춤에서 상좌가 떠나는 의미는 스님과 상좌가 서로 상극이라 소생하는 스님의 모습에게 다가설 수 없는 상좌의 아픔이 춤사위를 통해 나타난다. 이렇게 짜인 승무는 경기도 재인청승무와 강태홍류 승무 등 재인계통의 승무의 공통적인 성향이다. 지성승무의 복식은 스님의 평상복으로 우아한 자태를 나타내기 위해 고급소재에 의존하는 일반 승무와 상반되며, 승모와 소 가사, 염주, 홍 가사 등으로 구성된 소품에서 사찰의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홍가사에는 원과 학, 토끼를 수놓았는데, 원은 우주를 나타내며 학은 태양, 토끼는 달을 의미하며 지구의 음양조화를 일컫는 것이다. 홍띠는 안태(安胎)의 의미가 내재된 것으로 김덕명의 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 북은 죽음을 의미하며 스님을 살린 상좌가 남으로 떠나며 생사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연등나례살풀이춤연등나례 살풀이춤은 고려대전 연등회 때 국태민안을 위한 고려 초부터 행해졌던 축귀의례(逐鬼儀禮)로서 잡귀잡신을 달래고 쫒아 단지 안에 가두어 땅에 묻는 신앙적 성격이 강한 춤이다. 중국에서 들어 온 나례는 고려 정종 6년(1040)에 나례의 기사가 보여 정종 대부터 계동대나례가 시행된 것으로 기술되었다.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잡귀와 사신(邪神)을 내쫒는 뜻으로 행해진 의식이었다. 연등나례살풀이는 푸닥거리를 시작으로 살풀이장단에 맞추어 액을 풀고 자진모리를 통해 푸닥거리를 한다. 연등나례살풀이에서 액을 푸는 춤사위에서는 사신을 수건위에 올려서 어르고 달래는 춤사위와 거부하는 사신을 잡아서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단지에 가두어 땅에 묻으러 가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춤 순서는 <푸닥거리춤> 대나무와 살풀이 수건을 활용해서 축귀형식으로 뛰고 때리며 사신의 정신을 잃게 한다. <살풀이춤> 사신을 달랜다. 수건위에 사신을 올려놓고 어르고 달랜다. 고리 푸는 사위에서 사신과 무언의 대화로 달래지만 사신은 더욱 거센 반응을 보인다. 수건 하나에 사신을 달래며 위협하던 무당은 감춰둔 수건을 꺼낸다. <타령춤> 사신을 단지에 가두기 위해 두 개의 수건으로 사신을 유혹한다. 수건위에 앉은 사신을 진정시킨다. <자진모리춤> 두 개의 수건 위에 올려진 사신을 때리고 돌리며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수건을 던진다. 이때 무당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기절한 사신이 깨어나기 전 단지에 가두고 땅에 묻는다. 연등나례살풀이춤은 살풀이춤과 무속춤이 조화된 춤으로 춤사위의 전반적인 호흡은 푸닥거리에서 기를 돋우고 살풀이장단에서 깊은 호흡과 함께 몸을 느슨하게 풀어주며 무속의식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함이 내재되었다. 무당의 복식과 소품으로 흰 치마저고리에 홍띠를 두르며 얹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다. 한 개의 수건으로 춤을 추다 푸닥거리에서 두 개의 수건을 사용하는 것도 이 춤에서 만이 볼 수 있는 특이함이지만 경기지역 등 무속계 살풀이춤은 대체로 두 개를 사용한다. 대나무가지와 단지가 소품으로 활용된다. 4) 연등바라춤붉은 장삼을 휘날리며 원을 따라 도는 보살들의 양손에 갈라 쥔 동발을 부딪칠 때마다 장엄하면서도 저린 속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바라춤이 탑돌이의 의미를 더해 가면 태평성대를 희망하는 구국불교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김덕명선생이 생전에 들려주는 염불소리와 함께 탑을 돌아간다. 동발이 짝을 찾아 울어댄다. 노구에도 좌중을 휘어잡는 선생의 염불 소리, 목탁 소리에 맞춰 탑돌이로 추는 바라군무는 불교의례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교방계춤 김덕명이 기녀 김농주에게 전승받은 춤은 그녀가 개성권번 제1기생으로 기예를 익히고 30세 되면서 평양권번을 그만두고 양산권번에 정착한 후 유일하게 남긴 작품들이다. 해방 후 사회분위기에서 기녀가 생활 일선에 나설 수 있는 무대는 요릿집으로 한정되었고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연구소를 차려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 김덕명과 함께 김농주의 춤을 배운 기녀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예술생활을 접으면서 김덕명만이 유일하게 김농주의 춤을 전승하게 되었다. 양산지역에서 권번의 춤은 세가지로 전승되는데, ①이주서-고수길의 계보로 이어지는 교방양반춤과 한량무가 전승되고 있었고, ②고수길이 김설암 스님에게 배운 신라장검무, ③고수길-김농주의 다양한 춤이 펼쳐진 것이다. 그녀가 보유한 전통춤은 교방타령무를 기본으로 하여 교방양반춤, 교방진연무, 교방살풀이, 소고춤, 한량무, 장기춤, 잉어춤, 신선무, 부마도의 등 다양한 작품이 있었다. 1) 교방타령(敎坊打令)춤교방타령은 교방의 전문 예기들의 기초 교양과목 증 하나로 양반들과 어울려 여흥으로 추던 춤이다. 춤사위는 남성적이며 부드러운 멋이 조화로우며 절도 있고 흥겨운 속멋이 내재된 품격 있는 춤이다. 타령이란 우리 고유 전통음악의 곡조로서 판소리, 민요, 잡가 등에 많이 쓰이는 순수 전통 고전의 음률이다. 이 타령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춤 선은 전, 후를 오가고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춤은 한량과 기녀가 마주보고 추는 형식으로 한량과 기녀가 서로 추파를 던지고 공감형성 되는 춤사위가 조화롭게 나타난다. 교방타령에서 연결되는 굿거리 춤사위는 1983년 이후 제자들에게 전승되지 않았다. 교방타령은 양반과 기녀가 어울리며 추는 춤으로 무게감이 있다면 굿거리 춤은 기녀가 화답하는 춤이다. 여성의 춤이면서 남성적인 멋이 묻어 나오며 발 디딤새에서 사뿐거리는 멋이 이 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춤사위 순서는 마주보고 서는 사위→팔 감는 사위→우, 좌 향 감는 사위→감아올리는 사위 →상 하 평행 반원사위→평 솟대사위→흥 돋우며 올리는 사위→상, 하 눌려서 젖히는 사위→손목 돌리며 활개 펴는 사위→양팔 상하 움직이는 사위→상하 팔 감는 사위→흥 올리며 전후 감는 사위→앞뒤 감고 교차하는 사위→평사위→사선 끌어올리는 사위→열림 사위→외발 서고 팔 감는 사위→사선 회전사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춤의 복식은, 남성은 흰 바지저고리, 검정조끼, 상투에 흰 수건을 묶고, 여성은 얹은 머리 또는 명주수건을 두루며, 자주색 호장저고리, 검정치마를 입고 소품으로 귀주머니를 단 자주색 허리끈을 맨다. 2)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교방양반춤은 양반이 관기들과 여흥(餘興)으로 즐겨 추던 춤으로 단아하며 사대부(士大夫) 양반들의 의젓한 귀품과 천하를 눈 아래로 보며 남성의 기백과 근엄함, 청초하고 담백함이 돋보이며 해학(諧謔)이 있는 양반의 기세와 품격(品格)을 느낄 수 있다. 춤사위에서 표출되는 무언의 속삭임은 사실적으로 전달되며 이춤은 교방의 전문예인들에 의해 창안되었다. 장죽과 부채를 활용한 춤사위에는 추파 던지는 사위, 햇볕가리는 사위, 공감형성사위, 위엄사위, 엿보는 사위 등 표현이 다양하다. 춤의 특징은 남성의 모습이 강하며 다양한 춤사위에 꾸밈이 없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팔의 움직임은 자유로우나 절제된 멋이 나타난다. 좁은 보폭과 굴신걸음으로 연결되며 기를 모우고 풀면서 안정된 걸음걸이로 중심을 잡는다. 부채와 장죽을 활용하고 도포자락의 움직임이 조화롭게 나타나는 춤사위는 동적이며 우아한 선학을 연상하게 한다. 도약과 디딤의 폭이 넓고 깊으며 하체의 강한 힘을 필요로 한다. 춤사위 순서는 장죽물고 바라보는 사위→양팔 펴서 감아올리는 사위→추파 던지는 사위→상 하 반원 평행사위→양 팔 들고 걷는 사위→햇볕가리며 엿보는 사위→활개 펴는 사위→으쓱이는 사위→상하 휘젓는 사위→위엄 주는 사위→부채 펴서 엿보는 사위→뒤축 굴림 사위→팔 돌림사위→선별하는 사위→옆걸음 사위로 이어진다. 춤의 복식과 소품은 흰 바지저고리에 대님, 행전, 속 두루마기, 황금색 또는 옥색도포를 입고, 소품으로 상투, 검정 갓, 장죽, 부채 등으로 구성된다. 3) 한량무(閑良舞)한량무에서는 한량과 색시, 승려의 만남은 삼각구도의 갈등으로 희비가 엇갈린다. 이는 알력이 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해학적이며 흥미진진함과 문란한 단면을 도출한 풍자예술로 인식된다. 한량무는 조선후기 관기에 의해 창안되고 기방춤으로 성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한량무에서 비중이 큰 인물은 승려의 출현이다. 승려는 한량과 색시와 함께 삼각관계의 중심에 선 인물이며 탈춤의 노장과장에서도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승려는 등장 후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파계하는 과정에서 종교인으로서의 품위와 가치를 잃게 된다. 이 춤에서 승려는 수도승의 참모습이 아닌 파계승(破戒僧)으로서의 모습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배불(排佛)정책 내지 억불(抑佛)정책의 일환에서 승려의 인격을 실추(失墜)시키며. 탈춤이 나 각종 민속춤에서 파계승(破戒僧)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의하여 승려들은 환속하여 민간의 재인이나 광대와 어울리게 되면서 승광대(僧廣大)가 되어 사당패(祠堂牌)가 성립되었다. 불교에서 형성된 춤의 대부분은 승광대에 의해 창안된 것이며, 19세기 말에는 사찰에서 춤을 금지하였으며 오늘날 전승되는 각종 민속춤이나 탈춤, 광대놀음에서 승려는 파계승으로 등장시키며 삼각관계로 인해 타락하며 품위를 잃게 된다. 한량무의 배역은 한량, 승려, 색시, 별감, 주모, 마당쇠, 상좌 등 7인이 등장하여 각 배역의 춤에서는 욕망-허망함-깨달음-화합하는 단계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김덕명은 1924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양산 통도사에 입사하면서 춤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1934년 평양기생 김농주와의 만남으로부터 권번춤의 진수를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김덕명춤의 세계는 사찰춤과 권번춤으로 크게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일반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그의 사찰춤은 ‘양산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나례살풀이춤’, ‘신라장검무’, ‘연등바라춤’ 등이 있으며, 그의 권번춤으로는 ‘교방타령’, ‘교방양반춤’, ‘한량무’, ‘교방진연무’ 등 다양한 춤을 보유하고 있다.그리고 김덕명의 춤인생 경로는 출생지인 양산 동면에서 시작되어 장년기의 진주, 노년기의 김해를 거쳐 다시 양산으로 이어진다. 그의 독특한 춤사위는 춤 인생이 시작된 통도사에서 스님에게 남성의 활기찬 춤사위를 익힌 후 평양명기 김농주로부터 부드럽고 우아한 춤사위를 학습하면서 그에게서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춤사위가 생성된 것이다. 대처승인 양대응·신경수스님은 상좌들에게 춤을 지도하며 각종 재를 도맡아서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러나 활성화 되어야 할 사찰예술이 단절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재의식을 통제하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1911년)과 그 이듬해 제정된 본말사법(本末寺法)에 따라 범패가 금지되었고, 해방 후 6.25전란 등 시대 변화와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대처승을 정리함으로서 양대응과 신경수 스님도 통도사를 떠나게 되면서 차츰 사찰예술은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통도사의 춤을 보유한 김덕명은 불교중앙문화원 예술원장의 신분에서 사찰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고 그와 함께하는 행각스님(魚山僧)의 범패와 바라춤, 승무, 학춤, 연등나례살풀이춤 등은 신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은 통상적 사찰의 춤으로 알려진 작법이나 나비춤과 달리 독창적인 춤이 전승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며, 전승자 신분이 승려에서 민간예인으로 전이됨으로서 전승단절을 막고 계승할 수 있었다는 것이 변환기인 근대무용사에서 중요한 점이며, 그 전환점에 김덕명이 서있다는 것이 무용사의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어야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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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221세기 밀레니엄시대(2000년)를 맞이한 김덕명(1924~2015)옹은 어느덧 고희(古稀)도 훨씬 지난 76세였지만 노년기의 공연활동과 지역민속발굴과 지도에는 장년 못지않게 원숙함과 열정이 넘쳐있었다. 2000년 4월19일 <국립극장 50주년 국립무용단 제79회 정기공연> 양산학춤 특별초청공연으로 영남춤 명인 ‘서울 나들이’에 초청되어 갈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4.12) 예고기사와 국제신문 디지털뉴스부(4.19)에 네 사람이 펼치는 네 가지 색깔의 춤판에 대한 소개에서 "소리는 호남, 춤은 영남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풍류의 정설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남춤이 한국춤의 주류에서 밀려난 것은 사실이다. 춤이 중앙집중 되었고, 무형문화재 지정과정에서 호남쪽 춤이 주요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4人4色 나흘간의 춤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영남춤이 처음으로 서울의 국립극장 무대에 선다. 이번 공연의 4색이 영남춤판의 주인공은 영남춤의 명인들인 김덕명, 김온경, 이윤석, 하용부이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씨는 양산 사찰학춤을 들고 나온다. 외로이 양산학춤을 지켜온 김씨는 이번 무대에서 이 춤의 원형을 선보였다”라고 알렸다. 이어서 5월 16·17일 호암아트홀무대에 오르게 되자 각종 매스콤에 대서특필하였다. 서울신문(5.2)기사 ‘인간문화재 3人의 전통춤 진수’와 조선일보(5.11) ‘인간문화재 한 무대에’ 기사에는 ‘사상 유례 없을 대원로들의 합동공연이 마련된 무대는 오는 16·17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제18회 명무명인전>, 세 노옹은 첫날 잇따라 무대에 선다’라고 하였고,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보유자인 김덕명옹은 ‘양산사찰학춤’을 춘다.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된 통도사에서 대대로 계승되었다는 이 춤은 지난 87년 일본 NHK의 세계춤 종합평가에서 ‘춤의 황제’라는 극찬을 들었다"라고 알렸다. 2002년 9월 6~7일, 공연기획사 이일공과 호암아트홀이 주최하고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세계민족무용연구소가 후원하는 행사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공연이 있었는데, 각종 매스콤에 예고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덩실 덩실 얼쑤! 8인 男舞 한마당,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남자들이 추는 정통 민속춤이 한자리에 모인다. 남무(男舞)부재 현상 속에 민속무용은 그나마 궁중무용에 비하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해 왔다는 점에서 더욱 화제다. 특히 문장원·황재기·김덕명은 80대로 민속춤의 산증인이다’ ,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 아비들>에서 멋과 흥으로 대변되던 우리 춤의 진수를 선보인다.’라고 했으며, ‘양산사찰학춤의 김덕명(80)은 일본 기생의 잉어춤 등에 능하고 학춤은 국내 최고라는 평이다. 학이 땅에 내려앉아 먹이를 먹고 암놈을 희롱하는 행동을 표현한 춤으로 도포와 갓을 쓰고 춘다.’(서울신문, 8. 29) 그밖에도 연합뉴스(8.29), 한국경제(8,29), 현대불교(8.20), 조선일보(9.5) 등에 예고기사로 크게 보도되었다. 춤판에서 남자춤꾼들의 모습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전통무용은 현대무용이나 발레에 비해 '남무부재 현상'이 더욱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춤에 한 평생을 걸어온 8명의 남성춤꾼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인다. 오는 9월6일, 7일 이틀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펼쳐지는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이 화제의 공연이다. 무대에 오르는 8명의 춤꾼중 셋은 이미 80대의 고령으로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리만 만들어지면 어디에서든 어깨를 들썩이며 일품 춤사위를 뽑아내는 '끼'와 '열정'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옹(80)은 고고한 학의 자태를 빼어나게 형상화한 양산학춤을 선사한다. 훨훨 날다가 내려앉아 두루두루 살피고 먹이를 휙 낚아채는 학의 모습을 선비의 차림으로 유장하게 표현해 낸다.’(한국경제, 8.29) ‘제도권 무계의 변방에 머물러 있는 다양한 한국 전통춤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 농악판, 탈춤판, 사랑방 등 선조들의 삶 주변에서 흥겨운 '놀이'로 추었던 춤의 원형질을 맛볼 수 있는 자리다. 아울러 호방한 남성춤을 만나기 어려운 무용계 현실에 비춰볼 때도 분명 이색적인 무대다.(현대불교, 8.29) ‘공연 제목은 설화 속 춤꾼 '처용'에서 따왔다. 출연자들은 공연장이나 학교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전통춤을 지켜온 명인들이다. '무용가'로 불린 적이 없지만 자신의 춤세계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남다른 사람들로, 생활터전의 주변에서 명맥을 이어온 춤의 자유로운 멋과 흥을 느낄 수 있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80)씨가 선보이는 양산사찰학춤은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돼 왔다는 학춤이다. 선비의 평상복인 도포에 갓을 쓴 채로 먹이를 살피다 휙 낚아채는 학을 재현한다. 김씨는 한량을 넘어선 직업 춤꾼으로 양반춤. 지성승무. 한량무. 나례무 등 다양한 춤사위를 보유하고 있다.(연합뉴스, 5.29) ‘무대에 오르는 춤을 보자. 승무, 살풀이, 태평무 등에 비해서는 대접이 형편없는 춤들이다. 그러나 명인들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너울너울 춤추며 한 세상을 보내고 있다. 당대 최고 즉흥춤이라는 문장원의 동래입춤, 맵시있는 자태가 빛나는 황재기의 고깔 소고춤, 한 마리 고고한 학을 연상시키는 김덕명의 양산 사찰학춤, 다양한 디딤의 묘미가 살아있는 정인삼의 진쇠춤, 굵고 시원한 마당춤…. 김덕명(78)옹은 어릴 적 부모가 보낸 절에서 도망쳐 나와 농악패를 따라 나섰다가 춤과 인연을 맺었다.’(조선일보, 9. 5) 2003년 11월 22일에는 <팔십인생의 춤> 학산 김덕명 80인생 정통고전춤 발표회(양산)가 양산문예회관에서 있었다.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하는 이번 공연에서는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습득하여 올바르게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경남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한 무대로 그 문화생들이 자리를 마련했다. 순수 정통 학산 김덕명류의 팔십 인생의 춤이 선보이는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도 직접 무대에 선다. 학산 김덕명은 양산시 동면출신으로 양산학춤을 오늘의 수준으로 이끌어 올린 장본인이며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 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춤사위를 선보여 왔는가 하면 후진양성에도 평생을 몸 바쳐 온 예인이다.(경남일보, 11.21) '지난 94년부터 양산학춤과 연등바라춤을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양산시와 경남도에 여러번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며 '내가 죽기 전에 학춤과 연등바라춤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꼭 보고싶다'고 말했다. 또 '전국에 걸쳐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내가(김옹) 가진 28가지의 춤을 표현하는 제자는 아직 없어 죽기 전에 다 전수할 수 있을지 항상 불안하다'고 걱정한다.‘ (부산일보, 11.28)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한 이번 공연은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해 문하생들이 마련했다.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 선생도 직접 무대에 올랐다.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한 학산 김덕명 선생은 양산사찰학춤, 연등바라춤, 지성승무 등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으로 문화재 지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현대불교, 12.1) 2005년 제8회 세계무용축제에서 다시 <전무후무(全舞珝舞)> 국보급 춤의 명인 6명이 무대에 올렸을 때에도 김덕명은 빠지지 않고 양산학춤을 추었다. ‘<전무후무(全舞珝舞, 珝는 옥이름 후)>. 춤의 명인 6명이 한 무대에 오른다. 강선영의 태평무, 김덕명의 양산학춤, 김수악의 교방굿거리춤, 문장원의 입춤, 이매방의 승무, 장금도의 민살풀이춤. 가장 젊은 장금도(77)부터 최고령 문장원(88)까지, 이들의 평균 연령은 82세다. 김덕명 양산학춤은 너울너울 학을 닮아가는 한량을 그린다.’(조선일보, 9.22) ‘김덕명의 인터뷰 중 "학춤 출 땐 정신부터 학이 돼요. 요즘 춤추는 사람들은 장식에 치중하느라 뿌리를 놓치는 것 같아. 우리끼리야 누가 잘 하나 따져 뭘 해. 다들 춤에 미쳤지. 그렇지 않고서야 80 넘어 90이 다 될 때까지 고생고생 하며 춤출 수 있나. 앞으로 열흘 몸 건사 잘 해서 무대에서 구부러지지만 마시소들!(웃음)”(조선일보, 9.28) ‘걷는 것은 두려우나 춤은 두렵지 않다…. 지난 8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오늘 하루를 위해서 일생을 장만해온 것처럼, 몸이 아니라 춤만 남았다….” 어느 이의 말처럼 전무후무한 공연이었다. 젊은날의 그것만 했으련만, 80년 묵은 육신에서 곰삭은 춤 맛은 감히 평할 것이 아니었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 내외 관람하면서 "아주 신명이 났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다.’(경향신문, 10.10)(양산신문, 10, 5) 2008년 12월 5일 영남명무전 <무림평전(舞林平定)>이 통영시민회관 대극장에 있었다. 경남도의 전통 춤판을 지켜가는 남성 5인방이 한자리에 모인다. 김덕명, 이윤석, 하용부, 김선옥, 김홍종 선생이 영남명무전 ‘무림평정’(舞林評定)으로 다음달 5일 통영시민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경남도 전통춤계의 큰 어른들인 다섯 선생은 전국전통예술계에서도 반열에 올라있는 춤꾼들이자 광대들이다. 이들 다섯 춤꾼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지난달 람사르 총회 기념 인간문화재 명무전에서 한 무대 오른 후 이번에 통영을 찾게 됐다. 우리나라 대표 춤꾼이자 큰 선생인 김덕명 선생은 이번 공연에서 조선시대 양반들의 곧음과 부드러움, 세심함과 단아함을 표현하는 호걸 양반춤으로 통영시민들과 만난다.<경남매일, 11월 24일> 호걸양반춤의 김덕명, 채상소고춤의 김선옥, 통영문둥북춤의 김홍종, 덧뵈기춤의 이윤석, 밀양북춤의 하용부. 경남 전통 춤판을 굳건히 지켜가고 있는 명인들의 춤사위가 통영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이번 공연제목 ‘무림평정(舞林評定)’에는 다른 깊은 속뜻이 있다고 한다. 연출을 맡은 김홍종 선생은 "춤판을 평정한다는 제 잘난 멋의 과시가 아니라, 한 가지 분야에서 올곧게 정도를 지키며 살다보면 누구나 존경을 받아야 하는 세상의 이치를 춤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김덕명 선생과 같은 선배를 아울러 모시고 싶은 후배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다고 한다.<양산신문, 12. 21> 구순의 나이에도 정정한 목소리와 자태는 제자들을 사로잡았다. 학산 선생은 공연이 아닌 발표회라는 것도 강조했다. "공연은 돈 받고 보여주는 거야. 발표회는 연습 결과를 보여주고, 관객들이 춤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거지." 양산학춤보존회는 구시대, 장악원 등 전문 예술인에 의해 생성돼, 1930년대에 평양 명기 김농주에 의해 양산권번에 정착됐다. 학산 선생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 호걸양반춤의 호탕하고 의기 넘치는 춤도 선보였다. 구운몽을 바탕으로 만든 무언 무용극인 한량무의 해학은 웃음 을 연발하게 했다.<양산신문, 12.4> 2014년 3월20일 진주전통예술회관에서 학산 김덕명선생의 제2회 한량무발표회를 가졌다.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한량무’ 공연은 학산 김덕명선생의 가르침으로 우리나라에 하니밖에 없는 일곱배역이 있는 극으로 된 무용이다. 한량, 색시, 상좌, 주모, 승려, 별감, 마당쇠로 총 9마당으로 구성돼 있다.<진주인터넷신문, 2014. 3.20> 이상에 소개한 신문기사 외에도 많은 공연활동과 전수활동이 있었으나 지면관계로 다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구십대에 이르기까지 중앙무대와 향토무대를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무대를 장식하며 남성다운 춤, 영남덧뵈기춤, 사찰계춤의 진수를 보여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김덕명은 양산 통도사와 양산 권번에서 전승된 독특한 춤사위를 지닌 독보적인 춤꾼이다. 그런데 양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보류된 안타까움 속에 있을 때 진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가 진주와 연을 맺게 된 것은 마지막 기녀출신들의 노력으로부터였다. 당시 김덕명은 그가 소원하던 학춤이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서 보류된 후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었을 때 연로한 진주의 보유자들이 김덕명을 찾아 지속적인 부탁을 했고 또한 진주는 전국 제일의 종합예술행사인 개천예술제가 개최되는 예향이라는 것과 그의 학춤발굴자였던 서국영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이다. 진주의 예술이 기녀들에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교방이 해체된 후 1913년 기녀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진주기생조합을 결성하였다. 이어 1928년 4월, 김창윤에 의해 진주권번이 운영되었으나 부실하였다가 1938년‘최치환’에 의해 진주예기권번이 창립되었다. 진주권번의 춤 선생인 최완자(崔完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주로 감영에 선발되어 궁중연희에 참가했다. 그녀의 제자 김수악(金壽岳), 강귀례(姜貴禮), 강순금(姜順今)등이 1967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의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김덕명을 모셔와 1976년부터 예향 진주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79년 5월2일자로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한량무가 지정되면서 보유자 김덕명 외 7명으로 등재되었다. 김덕명의 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 깊고 빛나는 업적은 진주와 양산(梁山)지역에서 무형문화재를 전승시켰으며, 민속놀이 발굴과 전승에도 큰 공로를 김해지역에서 문화예술의 밑거름으로 남긴 가락오광대와 석전놀이, 김해농요 등을 발굴 전수시킨 흔적을 볼 때 그를 다재다능한 예술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1990년 후반, 양산시 덕계리에서 망시곱배기놀이 발굴하여 경남무형문화재 제23호 웅상장원놀이로 지정되는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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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1양산학춤은 2014년과 2016년, 2017년 등 지금까지 네 차례 무형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심사 단계에서 신청자에 대한 관련 단체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하고 지정이 무산된 것이다. 양산문화원은 양산학춤 전수회관 건립도 추진하는 등 양산학춤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산학춤은 통도사에서 전래해 지역에서 동면 출신의 학산 김덕명 옹이 전수해 민간 계보로 전승된 지역 고유 춤으로써 선비 사상을 강조한다. 이병옥 교수가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의 전승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첫째,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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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기악, 소리, 춤, 무속, 공연놀이, 의례 등 우리 전통 예인 110인을 5개 분야로 나눠 소개한 책이다. 거문고 산 조의 강동일, 단소 김무규, 배뱅이 굿 이은관, 태평무강선영, 부채춤의 김백봉, 양주별산대놀이 김상용 등 명인들을 컬러사진으로 소개했다. [지은이] 이규원 194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주간 종교신문 취재부장으로 근무하면서 동서양 종교를 두루 섭렵했고 월간 『광장』 편집장을 역임했다. 1988년 세계일보에 입사하여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재냈다. 현재(사)한국언론인연합회 이사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전수자이고 온 세종교신문 발행인 겸 편집국장이다. 1995년 『문예사조』지 시 부문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제6회 부원문학상을 받았으며 한국자유시인협회 이사로 시작활동 중이다. 이 책으로 제 27회 한국기자상 본상과 제36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차세애』(공저, 대원미디어), 『한국의 사찰 탐방』(공저, 불교사상사) 등이 있다 기악 1. 강동일 - 거문고 산조 2. 김무규 - 단소 3. 김영채 - 해금 4. 김오채 - 설장구 5. 김천흥 - 해금 6. 박귀희 - 가야금 병창7. 박동신 - 잽이 피리 8. 박범훈 - 피리9. 박종선 - 민속악10. 서용석 - 대금11. 윤윤석 - 아쟁12. 이생강 - 대금13. 이승렬 - 집박14. 전경환 - 농악 상회15. 전사섭 - 설장구16. 정달영 - 가야금 병창17. 정철호 - 아쟁 산조18. 지성자 - 가야금 산조19. 천대룡 - 고수20. 함동정월 - 가야금 산조21. 황병기 - 가야금 소리1. 강도근 - 동편제2. 강준섭 - 진도다시래기3. 김경복 - 서도 명창4. 김길임 - 강강술래5. 김덕순 - 여창 시조6. 김소희 - 동편제7. 김애정 - 국악인8. 남해성 - 여류 명창9. 묵계월 - 경기 12잡가10. 박동진 - 명창11. 박상화 - 영가무도12. 박송희 - 명창13. 박홍남 - 산유화가14. 선우향 - 여류 명창15. 성창순 - 강산제 명창16. 소동규 - 내포제 시조17. 신유경 - 육자배기18. 안비취 - 경기민요19. 안숙선 - 명창20. 안승삼 - 배치기 노래21. 오복녀 - 서도소리22. 오정숙 - 명창23. 이동규 - 남창가곡24. 이용배 - 임방울제 명창25. 이은관 - 배뱅이굿26. 이은주 - 경기잡가27. 장월중선 - 흥부가28. 정광수 - 명창29. 정회천 - 보성소리30. 조공례 - 남도 들노래31. 조상현 - 명창32. 조을선 - 제주 민요33. 조통달 - 명창34. 최광순 - 홍성 결성농요35. 최봉출 - 정선 아리랑36. 한농선 - 명창37. 한동희 - 회심곡38. 한승호 - 적벽가39. 황용주 - 선소리 타령 춤1. 강선영 - 태평무2. 김계화 - 교방굿거리춤3. 김덕명 - 양산 사찰 학춤4. 김백봉 - 부채춤5. 김수악 - 굿거리춤6. 김숙자 - 도살풀이7. 김진홍 - 한량춤8. 박정수 - 일무9. 박홍도 - 문둥북춤10. 안채봉 - 소고춤11. 양소운 - 해주검무12. 이동안 - 마지막 도대방13. 이매방 - 승무14. 이애주 - 승무15. 장금도 - 동살풀이춤16. 장홍심 - 바라승무17. 정경파 - 살풀이춤18. 하보경 - 밀양북춤19. 한진옥 - 춤꾼 무속1. 김금화 - 황해 강신무2. 김대례 - 진도씻김굿3. 김석출 - 세습 무가4. 김윤수 - 제주칠머리당굿5. 김점식 - 서울 무악6. 김찬섭 - 무악 피리7. 박병천 - 무악8. 박어진 - 서울굿9. 송동숙 - 오구굿10. 신석남 - 동해 세습무11. 오수복 - 강신무12. 오옥주 - 강신무13. 이선비 - 강신무14. 장보배 - 황해도 강신무15. 조한춘 - 경기 무악 공연 / 놀이 / 의례1. 공옥진 - 창무극2. 김덕수 - 남사당해3. 김복섭 - 독경4. 김상용 - 양주별산대놀이5. 김재원 - 남사당패6. 문장원 - 동래야유7. 박계순 - 남사당8. 박세민 - 염불9. 박송암 - 범패10. 박점실 - 동래야유11. 박후성 - 창극12. 여재강 - 북청사자놀음13. 이강덕 - 종묘제례악14. 이상호 - 하회별신굿탈놀이15. 이일웅 - 범패작법16. 조승자 - 어름광대 "이화 도화 행화 방초들아 일년 춘광 한틀 마라너희는 그리하여도 여천지 무궁이라우리는 단 백세뿐이니 그를 설워하노라"모시 적삼에 잠방이를 정갈히 다려 입고 통부채로 더위를 쫓으며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세월을 희롱한다. 오가는 길손 있으면 어느덧 벗이 되어 비장해 두었던 한 수를 읊어 댄다. 거기에 동자 있어 밥 나르고 술 따르니 이 아니 신선일시고. 시조에는 군살이 없다. 초장 중장 종장의 3행으로 인간사 막힌 숨통을 터 주고 촌철살인하는 옛선비들의 기지가 넉넉하다.국내 유일의 여창 가곡 분야 기능 보유자(제30호, 1973년 지정) 월하(月荷) 김덕순(金德順.74) 씨. 김월하라고 해야 선뜻 알아듣는 '덕순 할머니'. 월하는 부산 구덕수원지 뒷산에서 시조 배울 적 '어느 후덕하신 어른'이 지어주신 아호일 뿐 이름이 아니라며 뒤늦게나마 덕순이라 불려 보고 싶다고 자청한다. - 본문 187쪽에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얘깃거리가 있다. 막상 털어놓고 나면 별것이 아닌데도 혼자 보듬고 지척이며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 비밀 같은 것 말이다. 바로 우리의 전통 예인들이 그러했다.민초들의 우상으로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이들은 오히려 민초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해 왔다. 민초들은 전통 예인들의 행위 예술에 도취되면서도 "내가 저 짓을 않길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으로 예기(藝技)를 즐겨 왔던 것이다.이토록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소위 양반 부류나 가진 자들이 예인들을 대해 왔던 정서는 어떠했겠는가. 멸시, 천대, 경멸... 그래서 민중들의 예인들은 입을 다물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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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인명무전 “8인 8색” 6 월 4 일일 시: 2008 년 6 월 4 일 19 시 30 분 장 소: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연지홀 문 의: (063) 850-6212 / 김남인 011-670-7713 1. 태평지무 출연 / 호남춤연구회 2. 박금슬류 살풀이춤 /궁중무용 진안 금척무 전승자 출연/김광숙(전북예인) 3. 연등나례살풀이춤/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경상남도 한량무 보유자 출연/김덕명(인간문화재) 4. 대구살풀이춤/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 출연/권명화(인간문화재) 5. 남도살풀이춤 출연/송준영(조선대학교 명예교수) 6. 금아살풀이춤 출연/이길주(원광대학교 교수) 7. 영남살풀이춤/부산광역시 제14호 동래한량무 보유자 후보 출연/김진홍(준인간문화재) 8. 원향살풀이춤 출연/엄옥자(부산대학교 교수)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 예능 보유자 9.호남살풀이춤/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보유자 출연/최 선(인간문화재) 10.진도북춤 출연/호남춤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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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산국악당 개관축제 ‘목멱풍류’ 11월 21일 ~ 12월 02일일시 : 2007년 11월 21일 ~ 12월 02일 평일 19시 30분 토,일 17시 장소 : 서울남산국악당 문의 : 세종문화회관 전통국악공연장운영팀 02- 399-1191~3 歌 - 뿌리 깊은 소리빛깔(11.21~11.25) 정가, 판소리, 민요 등 전통성악을 조(調)별로 분류한 소리중심의 공연 ▶ 마음을 가다듬는 노래, 정가(11.21) : 김호성·이준아·김병오·황숙경·한자이·서울악회 ▶ 한(恨)의 노래, 계면조(11.22) : 김일구·성창순·김명자·최진숙·김태희 ▶ 굽이굽이 넘는 노래, 메나리(11.23) : 김영임·김덕명·정회석·이영신 ▶ 기상의 노래, 우조(11.24) : 송순섭·안숙선·유미리·정예진·안선영 ▶ 신명의 노래, 평조(11.25) : 이춘희·김광숙·이금미·유지숙·남상일 ※ 음 악 : 김청만, 정화영, 원장현, 한세현, 홍옥미, 박준호, 김무길, 박종선 樂 - 향기 나는 가락여울(11.27~12.1) 우리 음악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야금, 거문고, 대금, 해금, 피리 다섯 악기의 정악과 산조의 명인들과 VJ 이기상의 진행으로 공연 ▶ 가얏소리 희희락락(11.27) : 최충웅·정회천·정회석 ▶ 거믄소리 울울창창(11.28) : 이오규·하주하·김광섭 ▶ 맑은젓대 우리기상(11.29) : 김정승·박환영·이태백 ▶ 피릿소리 꿋꿋하여(11.30) : 정재국·최경만·장덕화 ▶ 해금가락 운율따라(12.1 ) : 조운조·김영재·장덕화 舞 - 고이 접어 사위나래(11.26/12.2) 대표적인 전통무용 춤꾼들의 춤판 ▶ 구름위에 발 내딛고(11.26) : 김영숙·진유림·양성옥·김삼진 ▶ 범나비야 너도 가자(12.2) : 정재만·임이조·최종실·국수호 부대체험행사 ▶ 다례체험(11.21~12.2) : 전통찻집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무료 다례체험 ▶ 문화체험(11.24~24/12.1~2) : 전통등 만들기, 먹그림 그리기, 손글씨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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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ance 2005-전무후무일 시 : 2005년 10월 8일 ~ 9일 장 소 :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춤을 오늘에 전해준 춤꾼들이 세월을 삭혀 만든 최고의 명무를 감상하는 반열의 한 판! 이 땅의 전통춤은 구한말의 재인을 중심으로 전승되던 춤을 오늘에 전승한 것이다. 가교 역할을 맡은 제1 세대의 춤꾼들은 이제 8,90세의 최고 원로로 살아 숨쉬는 멋이 가득하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예인과 세월 속에 잠적하여 그간 존재를 알지 못했던 명무(名舞)가 함께 출연하는 귀한 무대이다. '전무후무(全舞珝舞)'란 가장 완전한 춤을 이룬 진정한 명인의 춤이라는 의미로, 완전할 전(全), 춤 무(舞), 옥 이름 후(珝), 춤 무(舞). 평균 나이 80세가 넘으니 우리시대에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판이 될 것이요 이후에 다시 꿈꿀 수 없는 반열의 판이 될 것이다. 이 공연을 위하여 조어된 말이고 후엔 이 공연을 기념하는 말로 남을 것이다. '들어올린 손끝 하나에, 내쉬는 호흡 한 자락에 인생과 연륜이 담긴 춤'으로 1998년 제1 서울세계무용축제 당시 프랑스 태양극단 연출자 아리안 무누슈킨과 브레멘탄츠테아터의 안무가 수잔 링케의 눈물을 자아내게 만들고 '육신은 날아가고 영혼이 춤추는 것 같아 . . .' 라는 탄식을 자아내게 만든 춤들이 다시 선보인다. 강선영 (1924~)의 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92호 예능보유자로 1988년 지정. 태평무는 왕과 왕비가 나라의 태평성대와 풍년을 축원하는 춤으로 빠르고 활기찬데다 춤장단이 복잡해서 음악을 알지 못하면 춤을 만들 수도, 출 수도 없다. 강선영은 13세에 한성준 고전무용연구소에 입소하여 승무 태평무 한량무 신선무 학춤 검무 등을 배웠고, 특히 한성준에게서 태평무 전체를 익힌 유일한 생존자. 19세에 한성준 무용단 부민관 공연에 출연하기 시작하여, 1953년 스승에게 배운 검무 살풀이춤 승무 바라춤을 조합하여 로 제1회 발표회 개최. 1998년 안성에 태평무전수관 건립. 이매방 (1927~)의 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로 지정된 대표적인 한국 전통춤. 아비뇽축제에 참가하여 르 몽드지로부터 '성스러운 타악기와의 대화를 전달하려는 것으로, 온 몸에 축적된 에너지가 춤을 통해 숭고한 손 주위로 번지고 북채를 통해 밤으로 펴지는 음악이 되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승무는 장관을 이루는 북가락, 세찬 장삼놀음, 빼어난 발디딤새의 춤으로 우리나라 민속춤의 정수라 할만큼 품위와 격조가 높은 춤. 선새의 승무는 유려하게 흐르는 춤의 조형적 선, 고고하고 단아한 정중동의 춤사위로 인간의 희열과 인욕의 세계를 그려낸 춤이다. 문장원 (1917~)의 은 첫 발을 떼는 춤이고, 일생을 송두리째 바쳐 완성해 가는 춤이다. 특정한 구성 없이 즉흥적으로 추어진다. 걷노라면 자연스레 밟히는 엇박은 관객의 허리를 곧추 세우고 남은 폐활량을 한데 모아 추임새를 뱉게 한다. 청송이 우거진 해변과 인적 드문 제실 등 놀이판에서 당대 최고의 명무였던 김기옥 김귀조 최소학에게 즉흥춤을 배웠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 야유 보유자. 김수악 (1926~)의 은 맨손으로 굿거리춤을 추면서 자진모리 대목에 소고춤을 엮어서 추는 전형적인 기방형의 춤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예능보유자.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예능보유자 지정. 10살에 진주 권번에 입적하여 본격적인 예능을 연마. 유성준 정정렬 이선유 김준섭 등에게 판소리를, 김종기 강태홍 이순근 박상근 등에게 가야금 아쟁 등 기악을, 한성준에게 승무를, 김녹주에게 소고무를, 최완자에게 굿거리춤 입춤 검무를 배웠다. 장금도 (1928~)의 민살풀이춤는 보통 살풀이춤이 수건을 들고 춤을 추는 반면 수건을 들지 않는 맨손으로 춘다하여 '민'자를 붙였다. 장단의 흐름은 살풀이 장단, 자진모리 장단, 다시 살풀이 장단으로 이어져 살풀이춤과 동일한 데, 가끔 흥이 나면 동살풀이춤까지 가미하기도 한다. 현재 유일한 전승자. 12살에 소화 권번에 입학하여 군대식 교육을 받았다. 김준섭 민옥행에게 소리를, 최창윤에게 승무를, 김백용에게 검무 화무 포구락을 배웠다. 특별한 춤사위를 내놓지 않으면서도 점점 멋을 더해가면서 장단을 이끄는 춤, 그래서 절대적으로 장단이 중요하다. 김덕명 (1924~)의 학춤은 옛적 출입하던 한량의 복장으로 추는 너울너울 학 같은 춤이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 지정. 훨훨 날다가 내려앉아 두루두루 먹이를 살피다 일순 획 낚아채는, 학의 상태를 오로지 선비의 차림으로 완벽하게 형용해 낸다. 학에 대한 정교한 모의를 가능케 하는 것은 탁월한 '디딤새' 때문이다. 83세 고령임에도 장전을 들어올릴 때 한치의 기울어짐 없이 단정하고 그 장단 속에 숨겨진 '대삼소삼'을 확실히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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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립무용단 전통춤공연무제 문서 창원시립무용단 전통 춤 공연 일시 : 2005.3.17-3.18 오후 7시 30분 장소 : 창원성산아트홀 소극장 프로그램 : 부채춤/성산어머니봉사회 살풀이춤/성산어머니봉사회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박은정,주지현,빈영주, 박진미,장은영,배효진,김수영 교방굿거리(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정혜윤 승무(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김평호, 이지영, 이형순, 최승희,김영애) 한량무.사랑가/정태진,김기표,우현진,이동용,정연태,김영애 공후/김경연, 박주은, 경경희, 임정미, 김명진, 장미경, 박정진(지도:조지영) 호걸양반춤/김덕명(3월 17일 공연) 양산사찰학춤/김덕명 (3월18일 공연) 북의 대합주/전단원 특별출연 학산 김덕명/무형문화재(왼쪽) 경남제3호 한량무 한량역보유자 정혜윤/경남무형문화재(오른쪽) 성산어머니봉사회 타악지도 정연태 비상임타악지도 박현호 생음악반주자 박준형 (타악) 이국도(피리) 정석동(대금) 윤호세(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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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무,춤추는 처용 아비들남무,춤추는 처용 아비들 일시 2005년 3월 8일(화) 20:00 장소 : LG 아트센터 보고픔도 극심한 허기의일종, 그 기갈을 달랠 굵직한 춤들이 찾아온다. 늘 생각하지만 보고픔도 배고픔 못지 않은 극심한 일종 이란 생각이다. 그 기갈을 달래줄 큰판이 선다. 바로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아비들)이다. 춤이라는 예술보다 삶에 물러나 있었던 숨은 자들, 여든 일곱의 노 명인부터 불혹을 넘긴 마흔까지 총 여덟 명의 남자들이 판에 서는 것이다. 오늘날 전통춤의 주류를 이루는 여무(女舞)가 아니고 승무와 살풀이 계통도 아닌지라, 낯설지 모르지만 아는 이들은 탄성을 지르는 최고의 '춤'이요 '꾼'들이다. 춤 하면 한량이고 한량하면 동래한량인데, 이번 판의 최고 어른 문장원(文章垣, 1917) 선생이 바로 그 동래의 마지막 한량이다. 26대에 걸쳐 동래에 세거(世居)해 온 토박이로 일생을 동래의 풍류에 바쳤다. 지금 여든 일곱, 텅 비운 몸으로 나가 여백과 만나는 선생의 춤은 한 폭의 세한도(歲寒圖)다. 고령의 관절이라 오금과 돋음의 폭이 좁아들었으나 걷노라면 자연스레 밟히는 엇박은 관객의 허리를 곧추 세우고 남은 폐활량을 한데 모아 추임새를 뱉게 한다. 김덕명 선생의 '양산사찰학춤'은 또 어떤가. 한량의 복장으로 학을 형용한다. 어찌나 완벽하던 지 마침내 고고한 한 마리의 학이 되고 만다. 장자가 꾼 나비꿈처럼 학이 선비를 꿈꾸는지 선비가 학을 꿈꾸는지 분간이 묘연하니 분명 우리시대의 호접몽이다. 정인삼의 '소고춤', 하용부의 '밀양북춤', 이윤석의 '덧배기춤', 김운태의 '채상소고춤', 박영수의 '목중춤'이 모두 오르니, 옛적 밤드리 노닐던 처용아비처럼, 온몸에 춤을 가득 담은 남자들의 굵직한 춤판이다. 그간 이 남무(男舞)에 대한 앵콜 요청이 너무 많았었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지 못하다. 2004년 전국문예회관연합회의 순회프로그램으로 선정 되어 다시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2005년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을 갖는 것이다. 이번 공연은 원작에서 한 가지 변화가 있다. 당초 호암아트홀 공연(2002, 9.6- 9.7) 에는 황재기선생의 고깔소고춤이 있었다. 그런데 공연 후 돌아가셔서 아쉽게 장쾌하던 남무(男舞)는 칠폭으로 줄었다. 이에 남무(男舞)의 대칭으로 찾아 2004년에 올린 '여무(女舞), 허공에 그린세월'에 참여하여 뜨거운 갈채를 받은 군산의 예기 장금도 선생의 '민살풀이춤'을 초대하였다. 물론 우리 시대에 들어 나지 않은 춤이다. 그러나 손을 펴고 나오면 저절로 공기의 결로 스미는 탁월한 춤이다. 춤을 '육체의 시'라 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중에서 '그 나이였다. 그때 시가 나를 찾아왔다'란 구절이 눈에 띈다. 아무래도 2004년 통영, 울산, 고양, 순천으로 다듬잇살 잘 오른 두루마기차림의 그들이 행할 때, 분명 그때 춤이 우리를 찾아 올 것이다. ◈ 프로그램 - 문장원의 '동래입춤' 첫 발짝을 떼는 춤이고 일생을 송두리째 바쳐 완성해 가는 춤이다. 문장원의 입춤은 여든 일곱 텅 비운 몸으로 나가 여백과 만나는 한 폭의 세한도다. 걷노라면 자연스레 밟히는 엇박은 관객의 허리를 곧추 세우고 남은 폐활량을 한데 모아 추임새를 뱉게 하니, 보라! 마지막 동래한량이다. - 김덕명의 '양산사찰학춤' 예전 출입하던 한량의 복장으로 추는 춤이다. 너울너울 학 같은 춤, 종래에는 학의 동작을 생태를 더욱 형용하니 마침내 한 마리의 학으로 남았다. 장자가 꾼 나비꿈처럼 학이 선비를 꿈꾸는지 선비가 학을 꿈꾸는지 분간이 묘연한 김덕명의 학춤, 분명 우리시대의 호접몽이다. - 정인삼의 '고깔소고춤' 일생 판의 상쇠로 살았고 이제 한 걸음 나와 서슴없이 춤추려 한다. 어린 양화점 점원이 바라본 쇼윈도 밖의 화려한 행차들, 차마 그 꿈을 못 잊어 생의 한 갑자가 지난 지금, 그는 꽃을 이고 길떠난다. 흥의 벌판을 밟아온 꾼의 멋들어진 꽃그늘을 보자. - 이윤석의 '덧배기춤' 농사일과 춤일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춤의 고을 고성을 지키는 실한 말뚝이 이윤석, 춤 시간을 솎아내려 오광대회관과 비닐하우스 사이를 과속하다 늘 딱지를 떼이지만, 팔 걷고 판에 들어서 굵직한 뼈대를 펼치면, 그리운 조용배, 허종복의 덧배기 가락이 너울거린다. - 하용부의 '북춤' 아름답던 백발의 춤꾼 하보경. 우리가 한 시절 신선과 같이 살았던 기억은 옛일이 되어 이제는 손자에게 춤을 구해야 한다. 밀양강가 춤의 삼대를 흘러온 춤. 북을 울리며 그 여운에 몸을 맡기는 춤, 활개를 쉼 없이 들어올리는 편한 호흡, 그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 춤. - 김운태의 '채상소고춤' 트럭에 말뚝과 광목포장을 싣고 황토먼지 자욱한 남도 길을 마지막 유랑 행중 호남여성농악단 단장의 아들. 칠 십 년대 가파르게 넘던 보릿고개 언덕 위의 비 새는 포장극장을 박수갈채로 채워 넣던 일곱 살 소고의 신동, 그에게 백남윤에게 받은 채상소고춤이 있다. - 박영수의 '목중춤' '탈만 쓰면 탈춤이냐' 호령하던 사리원의 봉산탈 김유경이 떠난지 6년, 그러나 오래된 춤의 관례는 대를 이어 거행되고 있다. 선반기 앞에서 철을 깎던 몸이 춤이 되었고 쓸모 없는 근육마저도 연소시킨 한치 군더더기 없는 몸으로 '소상반죽열두마디' 만사위로 솟아오른다. 특별초청 - 장금도의 '민살풀이춤' '나는 없어서 먹고살라고 이거(소리) 배우고 저거(춤) 배웠어.' 군산의 장금도는 살풀이춤을 출 때 수건을 들지 않는다. 수건을 휘두르면 호흡이 깨지기 때문이다. 어린 날 탔던 인력거, 춤던 춤 때문에 죄인처럼 숨은 슬픈 어미 한손을 꺼내들면 공기의 결로 스며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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